2년 전쯤, 패션쇼에 간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패션쇼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만 보아왔지만. 이번엔 직접. 그런데 그동안 보아온 여느 패션쇼와는 달랐다. 같은 인류가 맞는지 재차 확인할 만큼 위화감 느껴지는 장신의 마른 모델들이 아니라, 내 이웃에 살 것 같은 친근한 이들이 여러 가지 옷을 입고 무대 위를 오고 갔다. 그곳은 ‘밀리터리 인 더 시티’라는 이름의 콘서트 무대. ‘전쟁 없는 세상’이라는 평화운동 단체가 주최하는 자리였다.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 준비된 영상이 있었다. 생활 속의 군사용어들을 안내해주는 영상물이었는데, 맙소사. 그렇게나 많이, 그렇게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 모두 전쟁과 군대에서 비롯된 말이었다니. 도전(전쟁을 촉발하다), 투혼(싸우려는 정신), D-데이(군사 공격 개시일)처럼 쉽게 쓰는 단어부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무수히 많이 들었던 이 말, ‘학생이 학교에 준비물을 안 가져오는 건 군인이 전쟁터에 총을 안 가져오는 거나 마찬가지야’까지. 우리 생활 속에 군대와 전쟁의 색깔이 얼마나 많이 스며들어 있는 것인지.
노래하는 나의 경우만 해도, 손가락을 다쳐도 내색 않고 공연을 위해 열심히 연주해준 기타리스트를 관객에게 소개할 때, ‘부상투혼’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웃음과 박수를 유도하는 설익은 예능감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영상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패션쇼. ‘밀리터리 인 더 시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대 위 사람들은 이른바 ‘밀리터리룩’을 입고 있었다. 가만있자… ‘밀리터리룩’이라니. 어머. 이거 군복을 밖에서 입고 다니는 거잖아. 카키색 재킷이나, 각기 채도가 다른 카키색을 모아 얼룩무늬를 만들어놓은 원단으로 된 티셔츠라든지, 같은 문양의 바지·치마·스카프 등등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보게 된 그것. 흔히 ‘워커’라 불리는 신발. 그것은 바로 ‘전투화’. 이런. 생활 속에 스며든 군사문화를 보여주려고 기획된 패션쇼에서 나의 머스트(낫) 해브 아이템을 만나고야 말았다.
갖고 싶었으나 이제는 갖지 말아야 할 물건이 된 워커. 마구잡이로 사육되고 도살당하는 동물을 보다 못해 채식을 하는 친구가, 자신의 가죽옷과 가죽구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경험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었다. ‘밀리터리 인 더 시티’는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알리는 평화 콘서트였다. 나는 그곳에 노래를 하러 갔던 것이고, 그 패션쇼는 평화 콘서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 나름으로는 평화를 지지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마음을 다지며 그곳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세련됐다 생각하던 옷차림이 군복이었고, 그토록 신고 싶던 신발이 전투화였다니. 유행하는 풍성한 망사 스커트에 발목 위로 올라오는 높이의 워커가 얼마나 시크한 조합인가를 떠올리며 달뜬 생각으로 보낸 밤이 숱한데. 마음에 쏙 드는 것을 못 만난 탓일까, 이상하게도 남이 신은 건 부러워해도 막상 사려면 망설여지고 그렇더라. 그러나 이제는 서둘러 워커를 구입하지 않은 내 자신에게 다행이라고 말하련다.
생활 속의 군사문화를 의식적으로 씻어내기 위해. 이제 ‘워커’는 머스트 낫 해브 아이템이다.
추신 그러나 볼수록 탐나는 사진 속의 이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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