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의 맛은 가혹했다. 대략 2년 만의 국외 출장이었다. 게다가 터키였다. 서울 이태원의 터키 식당에서 맛본 케밥의 원조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내내 사로잡혔다. 터키 요리는 프랑스·중국과 더불어 세계 3대 요리로 꼽힌다. 되네르 케밥을 보며 이국적인 냄새를 맡지 않을 도리가 있느냔 말이다. 모양도 근사하다. 세로로 길게 세워진 꼬챙이에 가늘게 썬 양고기를 켜켜이 끼운다. 고기가 익으면 긴 칼로 바깥의 익은 고기부터 썰어낸다. 칼을 잡은 터키 남자의 손목과 팔뚝에 털이 무성해야 제맛이다. 5월5~11일 터키에서 열린 민주화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한 여정은 길었다. 이스탄불문화원 등 터키의 문화학술단체가 일군의 한국 정치인, 학자, 언론인을 초청했다. 한국과 터키의 민주화운동 경험을 워크숍을 통해 교류하기로 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인천~도하 10시간, 도하~이스탄불 3시간이 걸리는 비행 시간을 버티게 한 건 진보 언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터키의 이국적인 요리와 문화를 맛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이국향을 기대하게 한 건 케밥만이 아니었다. 출장 전 뒤적거린 터키 여행안내서에서 ‘라크’(Raki)를 읽었다. 안내서를 종합하면, 라크는 포도로 만든 무색 투명의 증류주다. ‘독특하고 달콤한 향을 내는 아니스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고 씌어 있었다. 물과 섞으면 뿌옇게 탁해지므로 ‘아슬란 스투’(사자의 젖)라는 별칭이 있다고 안내서는 설명했다.
터키의 밤은 가혹했다. 이슬람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해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세속주의’가 터키를 대표하는 사상이다. 이슬람은 정치에서 분리됐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살아 있었다. 술을 팔지 않는 레스토랑이 너무도 많았다. 맥주는 비라(Bira)로 불렸다. 거의 매일 한국인 워크숍 참석자들은 술을 마셨다. 술 공급책 몫을 떠안은 내게 터키의 밤은 가혹했다. 한국처럼 편의점이 많지도 않았다. 호텔 주변을 벗어나 주택가에 가서야 맥주 등 술을 살 수 있었다.
“라크 한번 마셔보죠. 터키 대표 증류주라는데요.” “그럼, 맥주를 몇 병 빼고 그거 한번 마셔봅시다.” 5월8일 밤 10시 앙카라에는 터키 국기 모양과 똑같은 달이 떴다. 달뜬 가슴을 가라앉히며 라크를 따라 한 모금 마신 입에선 불이 났다. 드라이아이스를 삼킨 것처럼, 차가운데 뜨거웠다. 무색 투명한 라크에 대해 ‘보드카에 치약을 풀어놓은 맛’이라는 표현 말고는 당최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제안으로 졸지에 라크를 마시게 된 다른 워크숍 참석자들도 라크를 맛보고 내내 키득거렸다. 내친김에 안내서에 나온 대로 ‘라크 칵테일’을 만들었다. 라크를 물에 섞는 것이니 조리법이라 할 것도 없었다. 이번엔 “한국의 희석식 소주에 치약을 섞은 맛”이었다. 위키피디아는 ‘터키·그리스·불가리아 등 발칸반도에서 생선요리와 함께 먹는다’고 설명했다. 오리엔탈리즘의 가혹한 맛을 보고도, 나는 ‘고대 유목민이 일주일간 간하지 않은 양고기를 먹고 이를 닦기 귀찮을 때 마시면 어울릴 술’이라는 가당찮은 상상을 버리지 못했다. 오리엔탈리즘은 병이다.
이스탄불(터키)=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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