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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도 목넘김도 질주하네

정유정의 <7년의 밤>과 콜라
등록 2011-05-12 11:40 수정 2020-05-02 04:26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월요일이었다. 햇살이 항구에 쌓인 컨테이너 더미들 사이로 여리게 새어나오는 이른 아침이었다. 주말에 만나는 남자에게 일주일간의 이별을 고하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자 나와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해가 주춤주춤 기운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 꿈결 같은 시간에 정유정의 (은행나무 펴냄)을 읽었다.

책을 손에 든 이유는 두 가지다.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칼럼에 ‘찢어먹을’ 책장을 찾으려고. 목적은 두 개였으나 하나의 답만 얻을 수 있었다. 실패한 것부터 말하자면 살인과 복수란 두 개의 레일을 타고 내달리는 이야기 가운데 한갓지게 맛있는 걸 먹는 장면은 끼어들 수 없었다는 것. 오옷, 하고 얄팍한 마음으로 붙잡을 뻔했던 문장이라면 이 정도. “문득 배가 고팠다. 나는 부엌으로 나갔다.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찬장 문을 열어놓고 한참 고민했다. 뭘 꺼내려 했더라.” 주인공은 뭘 꺼내먹지도 못하고 냄비만 태워먹었다. 그리고 ‘부엌’‘냄비’ ‘먹는다’ 따위의 단어는 더 이상 이야기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찢어먹을 책장’을 찾진 못했지만 책장을 찢어가며 먹을 음식은 찾았다! 이 짧은 칼럼에서 이건 좀 이따 이야기하기로….)

이야기를 읽으려던 두 가지 목적 중 나머지 하나에 대한 답변은 강렬했다. 소설은 대문을 열자마자 ‘세령호 재앙’의 파편을 보여주며 사람을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 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과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그 공을 받아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서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선택을 한 한 남자, 딸의 복수를 꿈꾸며 7년간 칼을 간 ‘교정 전문’ 치과 의사 한 남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파멸과 생의 의지와 복수, 진실과 그 이면이 뒤범벅된 채 끝나지 않는 밤들이 있었다.

기차에서 프롤로그와 이야기의 앞부분을 읽다 깜박 잠이 들었다. 1시간쯤 자고 깼을 때, 정신은 꿈과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고 발 디딘 곳이 서울인지 부산인지 소설의 배경인 세령마을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눈두덩에 채 떨어지지 않은 잠을 떨쳐내고 여차저차 출근, 그리고 퇴근 뒤에 책 읽기는 이어졌다. 심장을 쫄깃하게 조여오는 이야기 탓인지 빈집에 홀로 들어가자니 마음이 서늘했다. 질주하는 이야기가 조정하는 대로 온 마음을 낚이지 않으려면 적당히 집중되지 않는 공간이면 좋겠다 싶었다. 카페로 갔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더 벌렁댈 거 같아 레몬 소다를 시켰다. 크~ 그런데 이게 웬일, 부글거리며 목구멍을 쏘아대는 탄산의 경쾌한 박자와 휘몰아치며 내달리는 이야기의 리듬이 기묘하게 맞아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책을 덮은 수요일 늦은 밤까지, 책 속의 문장들은 콜라·맥주 같은 부글거리는 음료에 섞여 들어갔다. 그중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꼽으라면 역시 탄산음료의 대명사, 콜라.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콸콸 부은 다음 튀어오르는 기포들을 얼굴에 맞아가며 목이 따끔거리는 걸 참으며 벌컥벌컥 마시는! 중독과 자극의 음료는 마지막 장에 도달할 때까지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 이야기를 닮아 있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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