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고나무 기자
클리셰(상투어)는 기자의 마취약이다. ‘마약’이라고 쓰려다 ‘마취약’이라고 고친다. 구하기 쉽지만 효과는 저열하기 때문이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표현을 달고 사는 신문기자라고 솜방망이를 맞아봤겠나. 나 역시 숱하게 ‘봇물 터지듯’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봇물이 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클리셰는 다행히 대안이 존재한다. ‘광어 다르고 도다리 다르다’고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동네 횟집에서 흔하게 사먹을 수 있는 두 생선 모두 가자미목에 속한다. 광어는 넙칫과, 도다리는 가자밋과지만 납작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눈이 영 똑같다.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눈이 왼쪽에 있으면 광어, 오른쪽이면 도다리다. 이른바 좌광우도. 봄철 생선 도다리회는 쫄깃한 식감이 최고다.
그러나 4월11일 저녁 목장갑에 튄 피냄새에 질겁하느라 좌광우도 따위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 서울 마포 농수산물시장에서 펄떡이던 녀석이다. 20cm 크기의 도다리를 고르며 “숨만 끊어달라”고 했다. “뭐… 해요?” 가게 주인이 아직 팔딱거리는 도다리를 봉지에 넣으며 무심하게 묻는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기에 회 안 뜨고 그냥 달라고) 해요?”라는 말이렷다. “요리에 관심 있어서 회 한번 쳐보려고요, 흐흐.”
자신감도 있었다. 지난해 참돔을 회 친 몸이시다. 마트에서 2만7천원을 주고 산 회칼은 믿음직스러웠다. 싱크대에서 검은 봉지를 끌렀다. 무심코 코를 훔치자 벌써 손가락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전날 미리 봐둔 블로그에서 광어 회치기 동영상을 다시 켰다. 모양이 비슷하니 회 치는 법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동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광어 머리를 친다 → 핏물을 물로 씻는다 → 꼬리가 내 앞으로 오도록 두고 등뼈에 칼집을 낸다 → 왼쪽 살집부터 회칼 칼끝을 세워 뼈와 살을 분리한다.’ 동영상을 정지시키고 싱크대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회칼을 집었다.
목장갑에서 비릿한 냄새가 번졌다. 엄지와 검지가 벌써 뻘겋다. 정확히 2년 전 봄 새벽 서울 마장동 축산물시장에서 핏물이 떨어지는 사분도체(4등분한 소의 일부)를 헤집고 다닐 때 맡은 그 냄새였다. ‘내 혀를 위해 너를 죽여야 한다’는 현실감이 목장갑을 통해 전해져왔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등뼈에 칼을 대기도 전에 도다리 꼬리를 놓친 게 세 번이었다. 닭의 목을 쳐도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회칼을 댈 때마다 머리 잘린 도다리의 등뼈 수십 개 하나하나가 꿀럭거리는 질감이 목장갑 너머로 전해져왔다. 질겁하며 꼬리를 놓칠 때마다 식은땀을 훔치며 ‘쪽팔리게 남자가…’란 혼잣말로 이겨내야 했다.
지난해 참돔을 손쉽게 회 쳤던 건 숨을 끊고 나서 하룻밤 묵혀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어와 도다리의 차이는 ‘아와 어’의 차이보다 10배는 컸다. 광어 회치기 동영상은 도다리 회치기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1시간 동안 낑낑거리며 2kg 도다리를 해체했는데 회는 한 접시도 채 얻지 못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클리셰를 대신할 표현 하나는 건졌다. 매달 같은 회사에서 글값을 받는 내 인생이 클리셰일 뿐.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오늘 오세훈 선고…쟁점 ① 3300만원 대납 알았나 ② 여론조사 의뢰했나

유시민 “‘뉴이재명’ 수장은 이 대통령일 가능성…검찰개혁 엉망”

김민석, 유시민에 “‘썩은 내’ 동지의 언어 아냐…엉터리 예언, 필패”

품위도 졌다, 아르헨 ‘주먹질’ 추한 마무리…“스페인 이겨야만 했다”

‘다 크면 4m’ 샴악어, 여주 하천서 발견…국제멸종위기종이었다

경찰, 강선우 ‘공직 대가 후원금 의혹’ 무혐의…“알선 대가 인정 어려워”

치과의사 딸 만들려고…‘제자 동원’ 전직 교수, 징역 3년6개월 확정

‘유치장서 반나절’ 성조기 여성 “김건희 여사 얼마나 불편하실까”

한병도 “보완수사 요구권 실질화”…보완수사권 전면 폐지 방침

홈플러스, 회생절차 연장에 영업 재개…67개 점포 다시 문 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