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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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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막장경영에 철퇴를 내리다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회사기회 유용 금지 제도 국회 통과…

기술 탈취나 총수 자녀에게 유망사업 기회 넘기는 행위 근절 기대
등록 2011-03-24 15:41 수정 2020-05-03 04:26

#1. 몇 년 전 한국을 대표하는 한 대기업에 휴대전화 부품을 납품하다가 기술을 탈취당해 문을 닫은 중소기업의 사연을 취재한 적이 있다. 대기업은 거래 조건으로 중소기업에 기술자료를 요구한 뒤 계열사에 몰래 넘겨줬다. 얼마 뒤 계열사가 부품 개발에 성공하자 대기업은 중소기업과의 거래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벤처 신화’를 꿈꾸며 은행에서 돈을 빌려 수십억원의 투자를 한 중소기업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됐다.

#2.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을 포함한 (주)한화의 이사들은 2005년 회사가 갖고 있던 한화S&C 지분 66.7%를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씨에게 싼값에 팔았다. 계열사에 정보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던 한화S&C는 안정적 사업 기반 속에 초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중이었다. (주)한화는 앞날이 밝은 한화S&C의 주식을 정당한 이유 없이 총수 아들에게 넘겨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

대기업에 기술 유용 여부 입증 책임

앞의 사건은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 기술 탈취의 전형을 보여준다. 뒤의 사건은 재벌이 총수 자녀에게 유망한 사업기회를 헐값에 넘겨 막대한 이득을 안겨준 ‘회사기회 유용’의 대표적 사례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사회적으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지만, 그동안 법망이 허술해 처벌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달라진다.

일본이 대지진과 쓰나미를 동반한 대참사로 공포에 질렸던 지난 3월11일, 한국에서는 재벌을 떨게 할 두 개의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나는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치는 대기업에 실제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 책임을 지우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오는 6월부터 시행하는 하도급법 개정안이다. 다른 하나는 이사의 회사기회 유용 금지 조항을 신설하고, 이사와 회사 간의 이른바 ‘자기거래’ 승인 요건과 대상을 강화해 내년 5월부터 시행하는 상법 개정안이다. 두 개정안의 통과로 앞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거나, 회사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기회를 정당한 이유 없이 총수 가족 등에게 넘기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한 간부는 “일본 지진으로 인해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그동안의 대기업 관행에 비춰보면 일본 강진에 비유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경제 민주화운동을 벌여온 경제개혁연대도 경영 투명성 제고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큰 계기가 마련됐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을 정도다.

» 지난 2월17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맨 왼쪽)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하도급법 개정안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 지난 2월17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맨 왼쪽)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하도급법 개정안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그 용어에서 짐작가듯이, 악의적 불법행위에 사회가 철퇴를 내린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미국·영국·캐나다 등 주로 영미법 계열의 국가에서 시행 중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경쟁법(우리의 공정거래법) 분야는 물론 악의적인 계약 위반, 인권침해 행위, 배임적 증권거래법 위반, 제조물책임 등 민사책임 전반에 걸쳐 시행되고 있다. 하도급법 개정안은 중소기업의 기술자료 유용이 고의·과실인지 여부를 입증할 책임을 대기업에 지움으로써 징벌적 손배배상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기반까지 마련했다. 그동안은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부터 기술을 탈취당해도 입증할 수 없어 가슴만 치는 일이 많았다.

신설된 회사기회 유용 금지 조항은 대기업 이사들이 회사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기회를 자신이나 제3자(흔히 총수의 자녀나 친인척)를 위해 넘겨줄 경우 이사회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도록 했다. 또 이같은 형식상 요건을 갖췄더라도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면 이를 승인한 이사는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다. ‘자기거래’의 경우 이사 자신은 물론 주요 주주(지분을 10% 이상 소유하거나 사실상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 그들의 직계존비속,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존비속, 이들이 지배하는 회사(지분 50% 이상 소유)가 회사와 거래할 때는 이사회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하고 거래 조건이 공정해야 한다.

재계·정부 반대에도 여야 합의 통과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과 회사기회 유용 금지, 자기거래 강화는 대기업의 강한 반대를 뚫고 5~6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에서 논의하다가 재계의 반대로 중·장기 검토 과제로 넘겨졌다. 회사기회 유용 금지 등도 2006년 10월 상법 개정이 입법 예고됐지만, 재계의 반대로 표류해왔다. 두 제도는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야 합의로 추진됐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친기업’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고 기업 관련 사전적 규제가 대폭 폐지 또는 완화돼온 흐름이 국회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대기업은 징벌적 손해배제상제 도입과 회사기회 유용 금지, 자기거래 규제 강화에 모두 반대한다. 전경련은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경우 “민법상 실손해 배상 원칙에 배치되고, 다른 법률과 균형이 맞지 않는 법 체계상 문제가 있다”면서 “행정적(과징금), 형사적(벌금) 조치가 중복될 경우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중소기업 기술 탈취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과 고의·과실 입증책임의 대기업 전환을 동시에 시행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연구원도 회사기회 유용 금지에 대해 “법리 구조에 대한 논증 없이 ‘일반 상식’의 잣대로 사안을 분석하고 일반인에게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재계의 주장이 큰 설득력을 갖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개추위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관련한 재계의 반대에 대해 “실제 손해를 초과하는 배상을 허용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는 절대적 판단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의한 선택에 달려 있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고의·과실 입증책임을 대기업으로 전환한 것은 전문성이 필요하고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할 때 필요한 조처다. 예를 들어 의료사고의 경우 입증책임을 환자가 아닌 의사에게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들의 반발과 관련해 “앞으로 중소기업에서 기술을 탈취하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 행위가 만연한 현실에서 사후적 규율을 강화하기 위한 상법 개정을 반대하는 것도 명분이 약하다. 경제개혁연대가 지난해 4월을 기준으로 자산 5조원 이상인 35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지배주주가 자연인이 아닌 18개는 제외)의 주식거래를 분석한 결과, 회사기회 유용이 의심되는 사례가 46건에 달했다.

오히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나 회사기회 유용 금지 이후에도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의 기술 탈취나, 재벌 총수가 경영권 세습을 위해 회사기회를 유용하는 사례가 근절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기술을 탈취당하더라도 바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송하는 순간 대기업과의 거래가 중단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과의 소송은 기업이 망한 뒤 취하는 최후 수단인 경우가 많다. 상법 개정도 우리나라처럼 재벌이 계열사 간 복잡한 순환출자로 연결된 상황에서는 큰 ‘규제 구멍’이 존재한다. 재벌 총수가 비상장 계열사를 통해 사익을 추구할 때 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반 주주가 없기 때문이다. 한 예로 재벌의 불법적 경영권 세습의 대명사가 된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의 전환사채 사건은 비상장기업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사들의 불법행위에 민사상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 대상 확대해야

따라서 이번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나 상법 개정은 일종의 ‘절반의 성공’이다. 앞으로 시행 효과를 봐가며 허점을 보완하고, 필요하다면 더욱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대기업의 기술 탈취 외에도 부당 반품, 대물변제 등 다른 불공정 하도급거래 행위로 적용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사개추위에서 논의됐듯이 공정거래, 식품, 제조물책임, 환경, 보건, 정보통신망범죄, 언론, 노동, 증권거래 등 다른 영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무서워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제도의 효과가 좋으면 적용 대상이 갈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법 위반 행위에 대한 대기업 입증책임 전환의 적용 대상을 함께 확대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실효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상법 개정도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이중(다중)대표소송을 도입해, 모회사의 소액주주들이 비상장 자회사 이사들의 불법행위에 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곽정수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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