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사진가 제프 월(1946~)은 이른바 ‘기호학적 연출 사진’의 대가다. 한데 그렇게만 표현하면 월의 사진이 1930년대에 유행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연출 사진과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진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용어를 통해 리얼리즘의 가치를 신화화했다면, 1984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월은 ‘재연출’(re-stage)이라는 방법을 통해 사진술의 문화적 기제를 고찰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1970년대 후반, 사진가 월은 영화 촬영 현장과 제작 관행을 고찰하며, 특정한 사건 혹은 상황의 재연출이 지니는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과 힘을 발견했고, 영화적 재현·재연의 특성을 스틸사진 제작에 적용하려 애썼다. 그를 통해 사진가는 작품 제작의 원점이 되는 사건(상황)과 그것을 재연출한 사건(상황) 사이의 거리를 사진으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1979년엔 제 사진을 광고 간판처럼 라이트박스로 제작해 전시하는 독특한 방법을 확립했는데, 관객과 평단은 익숙한 듯하지만 어쩐지 낯설고 불쾌한 사진 이미지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만약 월의 사진 가운데 미술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을 한 점만 골라야 한다면, 최전성기였던 1978~85년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다. 그러나 예술사회학적 관점에서 명작으로 꼽히는 것은 2001년작인 (After ‘Invisible Man’ by Ralph Ellison, the Prologue)다.
전구로 가득한 은신처와 흑인 주인공을 담은 이 사진은 앨리슨(1914~94)의 자전적 소설 (1952)의 도입부를 재현해낸 일종의 ‘삽화’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중략) 단지 사람들이 나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주인공의 지하실 거처를 묘사하는 방식은 그리 영화적이진 않다.
“내 동굴은 따뜻하고 빛으로 가득하다. 그렇다, 빛으로 꽉 찼다. 뉴욕에서 내 동굴보다 밝은 곳이 있을까. (중략) 지하 동굴엔 정확히 1369개의 전구가 매달려 있다. 난 천장이 가득하도록 빽빽이 손수 배선을 했다. 한줄 한줄 빠짐없이. 그것도 형광등이 아닌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구형의 필라멘트 전구를 썼다. 일종의 사보타주 행위다. (중략) 예전엔 어둠 속에 쫓겨 들어가 살았지만, 이젠 나도 볼 수 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불가시성의 어둠에, 난 빛을 밝혔다.”
소설을 삽화로 옮겨 그리는 일은 한때 미술가들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논리가 득세하면서, 삽화 작업은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퇴행적 행위로 간주됐다. 그런데 월은 뜻밖에도 소설의 주요 장면을 충실히 재연출하는 데서 전위성을 발굴했다. 밴쿠버의 작업실을 ‘보이지 않는 인간’의 거처로 꾸미고, 흑인 모델을 섭외해 연기를 시킨 뒤 촬영한 결과는, 작위적이고 연극적이지만, 야릇한 현실성 혹은 진실성을 띠며 전치된 리얼리즘을 제시한다.
은 리얼리즘을 초월해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기법을 망라하며 흑인 주인공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가는 음악적 문체의 사회소설이다. 그에 화답하는 월의 사진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문제적이고, 또 보면 볼수록 새롭다. 게다가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을 보고 빛바랜 옛 소설을 찾아 읽는 이가 적지 않으니, 어찌 보면 소설과 삽화의 주종 관계가 역전된 꼴이다.
소설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을 상상으로 보충한 결과는 미국 사회의 인종적 타자를 상징하는 ‘이름 모를 검은 주인공’에게 명시적 존재감을 부여했고, 이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우리에게 나지막이 질문을 건넨다.
“허나 누가 알겠는가, 저역대의 주파수로, 내가 여러분을 대변하는지도?”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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