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범의 작품 중에 라는 이름의 작은 조각이 있다. 손잡이 부분이 볼록하고 통통하게 부어오른 것만 제외하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망치 모습 그대로다. 낙타의 등처럼 보이기도 하고 봉긋하게 솟은 산등성이 같아 보이는 손잡이 속에 망치 2세가 자라나고 있단다. 자칭 임신 중이라고 말하는 이 망치로 벽을 후려치는 건 상상만으로도 망치에게 미안해진다. 제 몸 가누기 힘든 망치에게 못 박기는 파멸일 테니까. 작가 김범의 뼈있는 유머와 주종관계의 전복은 눈동자가 커질 만큼 신선하고 감탄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주무르고 만지고 써버리는 사물 이면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이상한’ 질서가 있다는, 그래서 내가 보는 세계는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숙연함을 몰고 온다.
망치로서 더 큰 숙연함을 몰고 오는 건 국회에 있는 국회 의사봉이라고 말하고 싶다. 호연지기 넘치는 야생성이 아닌, 약육강식의 야생성이 판치는 정치라는 정글에서 의사봉만이 제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온갖 성질을 부리는 의원들 사이에서 의사봉만이 완벽한 침묵과 ‘탕탕탕’ 소리 두 축을 오가며 진리와 정의를, 어쨌든 널리 공표해야 한다. 의사봉에게 이것은 불야성 카바레 안에서 나 홀로 선 것이다. 청교도적인 옷을 입고, 춤추고픈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야 하는 고달픔 같은 것 아닐까. 국회 의사봉은 회초리가 그렇듯이 표면에 어떤 아기자기한 패턴이나 장식도 없다. 남을 겁주고 평가하는 일에 장식은 쓸모가 없다. 장식 무늬가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은 20세기 초에도 있었다. 1908년 비엔나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꽃, 식물의 줄기 등을 본 딴 화려한 아르누보 디자인을 향해 “승화시키고, 돋보이게 하고, 정화시켜야 마땅한 문명의 방향에 역행하는 호색적이고 퇴행적”()인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국회 의사봉은 손잡이와 머리로 구성된 나무 망치다. 방망이 형태니 바닥이나 벽을 화끈하게 후려칠 때가 디자인과 기능이 100% 발휘되는 희열의 순간이다. 한데 현실의 의사봉은 ‘탕탕탕’ 탁자 위를 점잖게 두드리며 ‘오늘 회의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라고 의미를 시각화할 때는 정작 외롭고 심심한 존재가 된다. 의사봉이 관심과 구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협영화 미장센 같은 몸싸움에 의해 옷 속에 숨겨지고 매섭게 날치기를 당하는 순간이다. 뺏고 빼앗기는 주된 대상이 될 때다. 디자이너 앤서니 댄은 특정 사물이 엉뚱하게 확장 또는 왜곡된 기능으로 쓰이는 것을 ‘기생 기능’(para functionality)이라고 불렀다. 일탈 행위를 염두에 둔 디자인도 못하는 도발적이고도 시적인 성격을 의외의 사물이 자기도 모르게 실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기생 기능은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비평적인 디자인 행위로서 사물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성찰하게 할 때 의미가 있다.
의사봉의 엉뚱한 기능은 국회 밖에선 상상할 수 없는 하드코어라는 점에서 도발적이지만 의사봉의 권위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무늬만 의사봉인 ‘텅 빈 기호’의 목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지극히 관습적이다. 막이 오른 이번 정기국회에서 의사봉은 어떤 수난을 겪을까. 하와이 동포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보낸 첫 의사봉은 6·25 때 분실됐고 1960년대와 80년대에 한 번씩 의사봉의 머리 부분이 대책 없이 튕겨져나갔다. 의사봉 입장에서는 처럼 상상임신이라도 하면 편할까.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독립 큐레이터 현시원씨가 일상의 디자인이 품은 또 다른 의미를 파고드는 연재를 시작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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