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간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제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문장을 만들고자 할 때에는 그를 구성하는 개개의 단어가 지닌 의미를 적확하게 써야 한다. 그런데 단어를 사용하다 보면 그 개념이 아리송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사전을 찾는다. 사전을 찾으면 더 헷갈릴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진보’와 ‘전진’과 ‘진전’의 차이는 무어란 말인가. 세상을 구성하는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물과 관념이 가진 뜻을 한 권의 사전 안에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사전은 단어가 가진 대표적이고 단편적인 의미만 전한다. 더불어 사전 속 의미는 한 세월이 지나 살펴도 대체로 고정불변이다. 단어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이 달라져도 사전 속에서처럼 변함없이 굳건한 모습으로 유지되는 것일까.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의 천성
(푸른역사 펴냄)을 엮은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위의 질문에 아마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독일 빌레펠트대학의 교수였던 코젤렉은 진즉에 단어가 품은 개념의 깊이에 물음표를 달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자, 법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을 불러모아 119개 단어의 기본 개념을 톺아보기로 했다. 사전을 찾으면 몇 줄로 정리될 단어들이 한 단어마다 책 한 권의 분량이 될 정도로 방대한 개념을 품고 있었다. 그의 연구에서 개념 정리는 단편적 지식이 아닌 다의와 다층 속에서 역사의 변천을 포괄하는 길고 긴 여행이었다. 코젤렉을 위시한 연구자들은 1972년 첫 권을 발간하고 1997년 마지막 여덟째 권을 완성했다. 코젤렉은 공동 편집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꾸준하게 작업을 지속해 책의 출판을 완성했다. 한국에서는 이 성과물 중 문명과 문화, 진보, 제국주의, 전쟁, 평화 등 소개의 효과가 크거나 활용이 시급하다 생각되는 5개 항목부터 번역에 착수해 5권의 책으로 펴냈다.
개념사 사전은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기본 명제 삼아 단어의 개념이 어떻게 변천하고 흘러왔는지를 살핀다. 개념 변천의 근원을 찾기 위해 각 개념을 집필한 저자들은 라틴어나 고대 독일어가 쓰이던 시절까지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최초의 개념으로부터 그 의미가 분리 혹은 변이되는 과정을 훑거나,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원뜻의 근원을 캔다. 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에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걸친 시대 상황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흘러온 시공간을 채운 사건들이 단어가 개념을 정립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꼼꼼하게 더듬는다.
예를 들어 평화(friede)란 개념은 인도게르만어의 어근 ‘pri-’(사랑하다, 보호하다)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그리고 “평화의 상태를 ‘사랑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다음으로 평화 개념이 발달해오는 과정 중 생기는 의미 변형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온다. 더불어 ‘평화’의 해석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외래어 ‘pax, paix, peace’에 대해 끊임없이 고려하며 ‘friede’의 개념에 미친 시대 상황의 영향을 주시한다.
방대한 작업 규모만큼 깊은 이해 필요작업 규모가 방대한 시대와 자료를 포괄한 만큼 그 결과물도 광범위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래서인지 각 권 끝머리에 붙은 번역자들의 목소리는 공통적으로 벅차고 고단하다. 하나의 개념은 번역자들에게도 유럽의 역사와 철학, 종교에 대한 조예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중세 독일어 등에 대한 지식을 요구했다. 저자와 역자의 구슬땀이 어린 책인지라 읽는 눈도 쓱쓱 그냥 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자들의 몇십 년 노고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각 단어의 개념을 손에 얻는가. 공들여 읽어봄직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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