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대작’(屠門大嚼). ‘도문’(푸줏간 문)을 바라보고 ‘대작’(질겅질겅 씹다)한다는 뜻이다. 1611년 전라도 바닷가 유배지에 머물던 허균이 썼다. 할 일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예전에 먹던 음식을 하나하나 적었다. 허균 같은 지식인도 이런 ‘짓’을 한다. 그러니 입맛을 다시며 예전에 먹던 음식을 상상하는, 막 입대한 이병을 비웃지 말 일이다. 5월4일 저녁 밥을 먹다 말고 피에르 가녜르의 ‘쌀과 스파클링 와인 비스크’를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는 수컷도 비아냥의 대상에서 빼주시라.
그렇다, 피에르 가녜르. 2008년 10월 문을 연 롯데호텔 서울의 레스토랑 ‘피에르 가녜르’를 찾아가며 여러 번 발음을 연습했다. 그러나 건망증이 심한 혀는 연방 ‘가르니에’라고 발음하기 일쑤였다. 피에르 가녜르는 프랑스의 유명 레스토랑 안내서 에서 1998년 이후 여러 차례 최고 평점인 별 셋을 받은 요리사다. ‘요리계의 피카소’다. 그는 흰 접시를 캔버스라 했다. 그 위에 한국 식재료를 퓨전 프랑스식으로 요리한 음식을 펼쳤다. 색과 질감을 중요시했다.
그의 ‘예술 작품’이 담긴 숟가락을 입에 넣었는지 코로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저녁 기자간담회 뒤 호텔 근처 라면집에서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양이 좀 모자랐을 뿐.
양은 불만이었지만 그의 작명법에는 아주 반해버렸다. ‘피에르 가녜르’ 점심 코스 중에 ‘오마주 아 서울’이 있다. 이름 그대로, 한국의 식재료를 쓴다. 그의 요리가 진짜 예술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겠지만, 적어도 작명법만큼은 예술이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직설어법의 감각이 이 작명법에 숨어 있다. 가령 ‘고추기름을 가미한 호박 벨루테’ ‘졸인 사과주스에 버무린 완도산 전복’ 같은 식이다. 그러므로 점심 코스 가격 30만원에 작명 훈련 비용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길. 이 작명 감각에 어느 정도 적응됐다면 당장 응용하면 된다. ‘길동아~ 평택산 콩으로 만든 두부를 살짝 올린 김치찌개에 갓 수확한 경기미로 지은 밥, 안 먹으면 텔레비전 끈다!’
1년6개월 전에 맛본 그의 음식이 갑자기 5월4일 저녁에 생각난 이유는 분명치 않다. 맛보다는 ‘쌀과 스파클링 와인 비스크’라는 작명법이 문득 되살아났다. 비스크는 프랑스식 수프다. 육수, 우유 등으로 만든 국물이 베이스를 이룬다. 피에르 가녜르는 여기에 쌀을 넣고 다시 그 위에 스파클링 와인을 첨가해 톡톡 튀는 식감을 줬을 게다. 마치 무채색 상하의에 빨간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듯. 나는 숟가락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산도가 있는 ‘카바’(에스파냐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부르는 명칭)를 한 병 사왔다. 쌀을 씻고 압력솥에 안쳤다. 불을 켰다. ‘입만 살아가지고’라는 칼럼 제목을 배반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턱 근육이 긴장했다. 나는 ‘쌀과 스파클링 와인 비스크’에 도전한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다리를 긁으며.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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