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협력일기〉
(이숲 펴냄)는 서양사학자 박지향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가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주창하며 내놓은 저작이다. 기존의 친일 청산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관’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이젠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범적으로 시도한 것이 ‘윤치호 다시 보기’다. 일제 시기 대표적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친일파의 거두’였던 윤치호(1865~1945)의 사상과 내면을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영어 일기를 통해 재구성하고 재평가하고자 한다.
울고 짜봐야 소용없다며 3·1운동에 반대윤치호는 어떤 인물이었나? 젊은 시절 오랜 유학 생활과 교사 생활을 거친 윤치호는 당시로선 드문 국제적 배경에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사상으로 저자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를 꼽는다.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윤치호는 이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인식을 일생 동안 견지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떠 전사적 정신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에게 어떤 민족이 약한 것은 그 민족의 죄이지 다른 민족의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유와 정치적 독립은 만세운동으로 가능하지 않았고, 제 힘으로 싸워서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적 다윈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명 수준이 앞선 나라가 뒤진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고, 강한 인종이 약한 인종을 가르치면서 범한 일부 범죄는 ‘필요악’으로 용인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정신의 소유자였지만, 윤치호에게 그 백성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1천 명 가운데 채 한 명도 신문을 읽지 않는 무지한 대중이 ‘강건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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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에는 첫째로 국민이 지성과 부와 공공정신을 갖추고, 둘째로 국제정치적으로 찾아오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독립보다는 실용적인 교육을 우선시했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는 너무 엄격한 잣대로 사회 발전과 대중의 수준을 평가하였다”. 결과적으론 동족에 대한 불신과 이민족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가게 했다.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마치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한 것처럼 조선도 당분간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것이 현실주의자로서 그가 ‘저항’ 대신에 ‘협력’을 선택한 논리다.
협력이란 ‘조국을 배반하고 적과 협조하는 것’을 뜻하지만, 저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탈신화화와 협력 행위에 대한 재평가를 사례로 들어 저항과 협력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협력과 저항 모두 자립을 목표로 하지만 단지 그것을 성취하려는 수단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친일 민족주의자’라는 새로운 범주의 도입까지도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혹 윤치호는 ‘친일 민족주의자’였던 것일까?
접근법의 한계에 대한 고백“윤치호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일생 지녔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에필로그에 적었다. 윤치호의 입장을 내재적으로 이해해보려 한 접근법의 한계에 대한 고백으로도 읽힌다.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이 아닐까. 인질로 잡힌 사람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그에게 호감과 지지를 내보이는 심리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쟈 인터넷 서평꾼·blog.alad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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