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겨레 박미향 기자
“2200원입니다.”
오늘도 어김없다. 검정 비닐봉투에 물건을 담아내며, 슈퍼 아저씨가 사람 좋게 웃는다.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지폐 2장, 동전 2개를 꺼내 카운터에 내려놓고 봉투를 건네받는다. “안녕히 가세요”란 인사말이 “낼 또 봐요”로 들린다. 월·화·수 주초 사흘, 거의 예외 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이다. 봉투 안의 내용물? 초록 빛깔 영롱한 막걸리 2병이다.
‘가무’까지는 몰라도 ‘음주’만큼은 즐기는 편이다. 마감으로 퇴근이 늦어지는 목요일과 금요일을 빼고는 아파트 단지 코앞에 있는 슈퍼에 들르는 게 ‘제2의 천성’이 돼버렸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슈퍼 아저씨도 은근히 기다리시는 눈치다. 두어 달 전 퇴근길이었다. 집에서 “두부와 콩나물 부탁한다”는 주문이 문자로 날아들었다. 슈퍼에 쓰윽 하고 들어섰더니, 아저씨가 “2200원입니다” 하고는 씨익 웃으신다. “에?” 그때 내 손에, 막걸리 들려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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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처가에 의탁해 키우고 있다. 큰아이가 49개월, 작은아이가 13개월 됐다. 그 아이들을 맡아주신 장인·장모께선 팔순을 바라보시는 나이다. ‘체력이 달린다’는 말씀 나올 만하다. 둘째가 태어난 뒤로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가급적 저녁 약속은 피하게 됐다. 그렇다고 마시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는 법, 해서 등장한 게 ‘미스터 2200원’이다.
막걸리가 와인을 밀쳐내는 기특한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막걸리를 좋아했다. 향도 그렇고, 풍미도 그렇고, 적당한 양과 가격까지 맞춤한 옷처럼 느껴졌다. ‘조기 교육’ 영향도 있을 게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 방학식 하고 내려가서 개학식 전날 올라오던 외가댁에서 ‘전방’으로 막걸리 심부름을 열심히 다녔다. ‘적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지역’도 전방이지만,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도 전방이다. 전방(前方)은 ‘전방’으로 읽지만, 전방(廛房)은 ‘전빵’으로 발음해야 제격이다.
외가댁에서 ‘전빵’까지는 직선거리로 50m쯤 떨어져 있었지만, 배달지는 주로 들녘이었다. 노란빛이 곱게 바랜 주전자와 함께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소년이 다음에 무슨 짓을 할 것인지. 한번은 4살 어린 사촌에게 두 뚜껑(주전자 뚜껑을 잔으로 썼다)을 먹였다가, 녀석이 마당 한가운데서 비틀거리는 바람에 부지깽이를 피해 달아난 일도 있다.
간혹 “3300원입니다”란 소릴 듣기도 한다. 일흔여덟 평생 막걸리를 즐겨오신 장인께서 저녁을 드시고 가는 날이면, 미역국을 담아내던 대접이 막걸리 잔으로 둔갑한다. 막걸리 1병이면 꼭 2잔이 나오는데, 이런 걸 ‘대포’라고 부른다. 보통 장인께서 두 대포 하시고, 내가 네 대포를 한다. 가끔은 사이좋게 세 대포씩 나누거나, 장인의 따님께서 한 대포 거드시기도 한다. 그런 날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에 밤늦도록 별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 추위에 슈퍼에 다시 가긴 싫고…, 그럼 물이라도 한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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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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