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는 걸까? 요즘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한 1세대 아이돌들의 입담이 봇물 터졌다. 판도라 상자 속에 감춰둔 10여 년 전 일화들이 쏟아진다. god 출신 데니안은 “한류 스타와 사귄 적 있다”고 고백했고, 베이비복스 출신 심은진과 간미연도 각각 ‘베이비복스 불화설의 진실’과 ‘스토커 연예인 남친 이야기’를 폭로했다. S.E.S와 god 활동 당시 데니안이 유진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는 공중파 3사를 돌고 돌아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다. 1990년대 초반 음악 시장을 주름잡았던 룰라, 쿨 등이 돌아와 예능 프로그램을 한 차례 휩쓸고 가더니, 90년대 후반을 장식했던 H.O.T, S.E.S, 젝스키스 같은 1세대 아이돌의 ‘폭로 시대’도 도래했다. 10년 전 아이돌은 이제 대중과 함께 나이 먹으면서 데뷔 때보다 더 넓은 세대를 조준하며 살아남는다.
아이돌에게 영광과 오욕은 한 끗 차이
1세대 아이돌의 활약은 방송계를 장악한 아이돌 열풍에 닿아 있다. 1세대 아이돌이 태동한 1990년대와 걸그룹의 활약이 두드러진 2000년대는 시간차만 있을 뿐 아이돌을 둘러싼 환경이 다르지 않다. 데뷔 과정은 험난하고, 데뷔 뒤엔 경쟁이 치열하며, 은퇴 뒤의 삶은 여전히 캄캄하다.
1세대 아이돌은 1996년 ‘문화대통령’이 연예계에서 종적을 감춘 뒤에 등장했다. 5명의 ‘전사’(H.O.T)와 6명의 ‘수정’(젝스키스)이 격돌하고, 4명의 ‘요정’(핑클)과 3명의 ‘여신’(S.E.S)이 경쟁했다. 팬들 간의 기싸움도 대단했다. 기획사의 보호 아래, 팬덤의 비호 아래 음악시장은 아이돌이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이돌그룹이 성공하면서 신화, 베이비복스 등 아이돌의 흥행 신화를 이어가려는 댄스그룹이 2000년대 초반까지 등장했다. 이들의 이름은 곧 가요계의 상징이자 브랜드였다. ‘연예인님’은 10대들의 세상에서 하느님이었다.
아이돌이었으나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닌 이들의 연예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솔로 활동은 그룹 활동 때의 인기를 넘지 못했고 인기가 떨어질수록 하는 일의 리듬도 떨어졌다. (맨 위부터) 핑클·god·H·O·T·젝스키스. 한겨레 자료·JYP엔터테인먼트·SM엔터테인먼트·DSD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지만 아이돌의 생명력은 길어야 5년이었다. ‘립싱크 파문’처럼 대형 기획사와 팬덤 문화에 가려진 결점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아이돌그룹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젝스키스를 시작으로 아이돌그룹은 순차적으로 해체 수순을 밟아갔다. 그룹이 해체된 자리엔 개인만 남았다. 아이돌그룹 내에서 가창력을 뽐냈던 이들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S.E.S의 바다, 핑클의 옥주현, 신화의 신혜성 등이다. 드라마·예능·뮤지컬 등에서 살길을 찾기도 했다. 핑클의 성유리, 베이비복스의 윤은혜, 신화의 에릭 등은 아이돌의 이미지를 벗고 배우로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룹 활동 당시 일찌감치 스타성을 인정받은 ‘섹시 퀸’ 이효리, ‘춤꾼’ 전진 등은 애증 어린 대중의 시선 속에 방송 영역을 넘나들며 꿋꿋이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아이돌이었으나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닌 이들의 연예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솔로 활동은 그룹 활동 때의 인기를 넘지 못했고, 인기가 떨어질수록 하는 일의 리듬도 떨어졌다. 대중의 냉소 속에 1세대 아이돌은 드라마·예능·뮤지컬 등 다른 영역으로 겉돌았다. 아이돌 꼬리표는 영역 장벽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됐지만 연기력 논란 등의 그늘을 만들었다. 기획사가 책임지지 않는 아이돌은 뭘 할지 모르는 ‘아이들’이 되었다. 해체 이후에 활발히 활동하는 아이돌 스타와 달리 잊혀진 아이돌은 음주운전, 약물복용, 병역비리 등 각종 사건·사고로 소식을 전했다. 아이돌에게 영광과 오욕은 한 끗 차이다.
반면 일본 아이돌 시장은 오랜 세월 ‘국민 아이돌’을 만들어냈다. 보이그룹인 스맙과 소년대는 멤버들의 나이가 마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 20년 넘게 활동 중이다. 아이돌 연습생들은 ‘CD 데뷔’라고 하는 정식 가수 데뷔 전 드라마 출연 같은 연예활동을 하기도 한다. 가수 활동만 하며 음악성을 내세우기보다 영화·드라마 등 음악 외적 활동에도 비중을 둔다. 현재 한국방송에서 방영 중인 의 일본 원작 에서 유승호 역을 연기한 그룹 뉴스의 야마시타 도모히사도 연기로 사랑받았다. 아이돌 팝문화 세미나에 참가하고 있는 학생 한자영씨는 “월급제를 추구하는 일본 시스템에서 아이돌은 몇십 년을 살아남는다”며 “한국의 1세대 아이돌처럼 추억을 회상하며 생명력을 이어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한국 아이돌과 일본의 아이돌은 일회용과 일회용이 아닌 것”의 차이다.
걸그룹, 욕망만 투영하는 소비재
일본 시장을 닮은 듯 따라가는 한국 방송계도 2000년대 들어 변화가 생겼다. 2002년 동방신기의 등장에 즈음해 대중음악 시장이 지각변동을 시작했다. 벅스뮤직, 소리바다 등의 P2P 사이트가 소송에 걸리고, 멜론 같은 음악 사이트가 음원 유료화를 선포했다. 음반이 아닌 음원이 중심이 된 싱글 시장이 커지면서 아이돌을 상품으로 다루는 마케팅 방식도 달라졌다.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는 “아이돌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기획사들의 마케팅 방식도 진화를 이뤘다”며 “1세대 아이돌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음악성이 강조되고, 아이돌 훈육 방식도 드라마와 뮤지컬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 만들기로 달라졌다”고 말했다.
대중의 취향 변화도 아이돌 시장의 변화를 이끌었다. 2PM과 루시드 폴을 함께 듣는 대중은 더 이상 아이돌을 비하하지 않는 수용자가 됐다. ‘아이돌=한국 대중음악 시장’이란 등식의 성립이 음악 시장을 빈곤에 빠트렸다고 보지 않았다. 미국 진출로 세계 음악 시장을 넘본 원더걸스, 국민 아이돌이 된 소녀시대와 빅뱅 등을 친근하게 받아들였다. 브라운아이드걸스, 카라, 2NE1 등 걸그룹의 춘추전국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차우진 평론가는 “지난해 불거진 동방신기의 불공정 계약 문제는 1990년대 후반 H.O.T 사례와 다를 바 없다”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돌을 상품으로 보는 관점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쓴소리를 냈다. 걸그룹을 소비하는 방식도 여전하다. 보이그룹의 양현석, 토니, 앤디 등은 아이돌 후배 양성에 나서는 생산재가 됐지만 걸그룹은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는 소비재로만 쓰이고 있다.
대중문화의 아이콘 아닌 자본주의의 아이콘역경을 넘어 생산재가 되든, 그대로 소모되는 소비재가 되든 요즘 아이돌은 또래 20대의 처지와 근복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생존을 위해 음악 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영역을 불문하고 부르는 곳은 어디든 뛰어다녀야 한다. 때론 1세대 아이돌처럼 토크쇼에 출연해 폭로전도 불사하며 꿋꿋이 살아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을 부르는 티아라의 데뷔는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방송 첫 데뷔 무대는 였다. 노래보다 개인기 자랑에 열중했던 이들은 지금 예능과 드라마를 넘나드는 블루칩이 됐다.
경쟁의 시대에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하는 아이돌에게 세상은 아직 두려움의 대상이다. 잘나가는 아이돌도 미래가 불안하다. 최근 원더걸스 멤버 선미처럼 잘나가는 그룹에서 도 탈퇴하기 마련이다. 소속사 JYP는 선미의 탈퇴 소식을 전하며 새 멤버 영입도 함께 발표했다. 팬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다. 멤버가 탈퇴하자마자 신속하게 새 멤버를 투입한 소속사의 냉정한 결단에 비판이 쏟아졌다. JYP가 소속가수인 아이돌을 미국 시장에 대한 집념이나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재범 탈퇴에 따른 앙금이 남아 있는 상황에 ‘JYP 사장님’ 박진영은 수세에 몰렸다. 아이돌 껍질을 벗은 선미에 대한 걱정도 들끓는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걸그룹에서 탈퇴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과 그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다. 스타를 꿈꾸는 이들의 별이었으나 스스로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는 선미와 같은 아이돌은 또 누가 될 것인가? 아이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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