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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순한 조광희를 화나게 했나


영화 전문 변호사 1호, 남다른 깊이감의 글을 쓰는 그와 ‘남의 잔치판’에서 친해지다
등록 2010-01-27 15:53 수정 2020-05-03 04:25
임범 애주가

임범 애주가

2000년대 초반 영화판엔 활기가 넘쳤다. 화제작이 끊이지 않았고 관객 기록 상한선이 수시로 깨졌다. 스크린쿼터 운동도 있어서 영화 기자를 하던 나로선 취재할 게 많았다. 당연히 영화인 술친구들이 늘어갔는데 그래도 기자는 어쩔 수 없이 기자였다. 취재원과 막역해지기 힘듦을 새삼 느낄 때가 있었고, 영화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창 술 마시다가 문득 ‘남의 잔치에 와 있다’는 이물감에 젖기도 했다. 그때 영화판에 나 비슷한 존재, 딱히 영화인은 아니지만 영화인들과 수시로 부대끼던 이가 한 명 있었다. 조광희(44) 변호사였다.

조광희는 1990년대 후반부터 영화 검열 조항의 위헌제청 소송 등 영화 관련 송사들을 맡았고, ‘영화 전문 변호사 1호’로 자리매김하면서 당시 큰 영화사 네댓 곳의 자문 변호사도 맡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영화감독 임상수를 볼 때였다. 임상수가 입이 걸고 독설이 심하기로 유명한데, 조광희가 그와 친한 걸 보고 생각했다. ‘순하고 점잖은 사람이구나.’ 영화판 속 비영화인끼리의 유대감? 여하튼 반가웠다. 법조 기자를 할 때 개인적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그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소송을 전공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조광희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자라고 있는 사람,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다 자랐거나, 더 이상 꿈꾸지 않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요구하는 최소한의 권리다. …젊고, 불온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주는 것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많이 가졌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늙은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표현의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싶을 때가 많다. 조광희의 글엔 남다른 깊이감이 있었다. 그와 친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조광희와 술 마실 땐 뜻밖의 이점이 있었다. 그의 외모가 준수해, 신문사 여자 후배들이 조광희와 술 마신다고 하면 잘 따라나왔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그의 주가가 떨어졌다. 여성에 관심이 없는 ‘초식남’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조광희가 초식남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외모만큼이나 매너도 준수하다는 것이다. 점잖고 매너 좋은 게 장점이기만 할까. 사람이 뭔가 부족하거나 과해서 매력 있게 보일 때도 있지 않나. 조광희는, 음식으로 치면 심심한 서울 음식 같다. 자세히 보면 그 심심함 안에 푸근함과 정감이 있는데, 그걸 알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다. 조광희가 말수가 적기 때문에 더 그렇다. 지난 번에 썼던 건축가 조건영이 조광희를 안 지 얼마 안 됐을 때, 둘이 1시간 가까이 한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단다. “조광희는 왜 그렇게 말이 없냐? 딱 한마디 하더라. 날씨 좋죠?”

조광희의 ‘말수 적음’은 여행할 때 좋다. 여행은 서로 별말을 안 해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사람끼리 가는 게 좋지 않나. 6년 전 뉴질랜드에 갔다. 조광희는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과 함께 왔다. 저녁 때 내 방에서 술을 마시자고 불렀더니, 딸이 혼자 있기 무섭다고 했다. 변호사 부녀의 대화는 달랐다. “아동학대로 고발할 거야.”(딸) “아빠랑 같이 아저씨 방에 가 있다가 아빠 술 다 마시면 같이 오자. 그렇게 너와 아빠의 이해관계를 조절하자.”(조광희) 몇 년 뒤 제주도에 갔다. 조광희는 뚜껑이 열리는 차를 타보지 못했다고 했다. 파란색 미니 컨버터블을 하루 렌트했다. 교대로 운전하며 섬을 돌았다. 늙은 게이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린 별말도 없이 풍경과 기후에 집중했다. 제주시에 들어와서도 뚜껑 열고 달리다가, 그때 제주도에서 술집 ‘소설’을 하던 염기정에게 목격당했다. “멋진 차에 남자 둘이 타고 있는데, 보니까 흰머리(조광희)와 대머리(나)더라고.”

2006년 조광희는 변호사 일을 잠시 접고 영화사 ‘봄’의 대표로 갔다. ‘영화판 속 비영화인’에서 아예 영화인으로 전향했던 것이다. 봄으로 옮기기 직전에 수개월 동안, 강금실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대변인 일도 했다. 마흔 살 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좇아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가 멋있었다. 하지만 때가 안 좋았다. 영화계는 그때부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 제작 편수가 급감했다. 그가 신인 감독들 술 사주며 격려하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준비하던 영화들이 줄줄이 투자가 안 돼 엎어졌다. 지난해부터 조광희는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했다. ‘원’이라는, 민변 변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큰 로펌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부터 조광희는 조금 달라졌다. 진보적인 태도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예전에 그가 쓴 글들은 차분하고 온화했는데, 최근의 글들은 투쟁적이다. 이건 두말할 것 없이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주의의 퇴행 때문이고, 따라서 그의 글에 담긴 분노와 선동은 정당한 것이겠지만, 난 아직도 설득과 유혹이 좋은데, 내가 별달리 실천하는 게 없으니…. 뭐랄까, 순하고 점잖은 조광희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 아쉽다고 할까.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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