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 알겠니?’ 랜덤 채팅의 익명성은 호기심과 함께 긴장감을 유발한다. 한혜경.
6번 연속으로 딱지 맞았다. 아니 난 그냥 내 나이와 성별을 솔직하게 밝혔을 뿐인데, “대화가 종료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뜬다. 일곱 번째 상대는 “하이” 하더니 다짜고짜 “서울 상계동 24 남. 지금 번개 가능? 27 이하 강북녀만”이란다. 나는 “헐...;;;”이라 쓰고 대화를 종료한다. 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곳은 랜덤 채팅의 전당 ‘가가라이브’ 홈페이지다.
뭐,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고, 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하고 있을 것이다. 친구 J는 “거기서 남자애인 척하고 여자애 꼬인 적 있어. ‘번개’(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끼리 오프라인에서 실제로 만나는 것)하자고 다 약속해놨는데, 내가 바람맞혔지”라고 했고, 또 다른 친구 L은 “밤에 잠이 안 오고 심심해서 한번 해봤는데 재밌더라. 스릴 넘치고”라고 말했다. 일반 채팅 사이트가 ‘돈 필요한 여(女)’와 ‘성욕 충만한 남(男)’들의 아지트로 전락한 사이, 새로운 장르의 ‘랜덤 채팅’이 심심한 청춘남녀들의 놀이터로 급부상했다. 여기선 회원 가입 없이 바로 채팅을 할 수 있다. 대화창에서 나는 ‘당신’으로, 상대방은 ‘낯선 상대’로 지칭된다. 정초의 평일 새벽 3시인 지금, 동시 접속자는 3천 명 남짓. 누가 내 ‘낯선 상대’가 될지 알 수 없다(동시 접속자 중에서 랜덤으로 1대1 대화를 하는 시스템이니까). 여기서는 누구나 완벽한 익명이 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상한 인간들은 당연히 꼬인다. 마치 ‘익명의 정글’과도 같다. 한 네티즌은 자기가 허경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랜덤 채팅을 한 적이 있다며 대화창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더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될까? 다시 ‘대화 시작’을 클릭한다.
여덟 번째 대화 상대가 입장한다. 8번 타자 역시 인사 직후에 나이와 성별을 묻는다. 솔직히 대답해준다. 그는 자신을 ‘대학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20살 여자’라고 소개하더니, 내가 그 나이 때 했던 깨알 같은 고민들을 촘촘히 털어놓는다. “연애를 하려면 역시 술을 먹을 줄 알아야 되죠?ㅠㅠ”라는 질문에 나는 “네^^” 하고 음주량을 늘리는 각종 스킬을 전수해준다. 그 외에도 첫 연애의 시작, 대학 캠퍼스 생활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대로 된 대화는 이게 처음이다. 의욕에 넘쳐 자판을 두드린다. 그런데 꼭, 술자리에서 끝도 없이 주절거리는 복학생 선배가 된 기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8번 타자는 뜬금없이 대화를 종료한다.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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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타자에게는 내가 먼저 나이와 성별을 묻는다. 18살짜리 여자란다. 나는 남자라고 거짓말한다. 이번에는 별 정성 없는 가벼운 대화만 한다. 페X카나와 비X큐 중 양념치킨이 더 맛있는 데는 어딜까, 신정에는 뭐했니 등등. 그동안 나는 터프한 말투의 스무 살 마초남을 연기한다. 어설픈 마초 흉내에 질린 건지 소녀는 대화를 종료하고 사라진다.
10번 타자는 나이도 성별도 먼저 묻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도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뭔가 짐작할 만한 여지를 자꾸 흘린다. 그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유학하다 얼마 전에 귀국한 30대 초반의 남자인 것 같다. 나더러 자꾸 “귀엽고 당찬 아가씨로군” 하는데, 말투가 꼭 할리퀸 로맨스처럼 기름진 문어체다. 여러 주제로 얕고 넓게 이야기하다가, 연애로 화제를 옮긴다. 그는 갑작스레 어두워진다. 독일에서 약혼까지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불치병이 있는 걸 숨기고 있었고 결국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죽었다고 한다. 흔해빠진 드라마. ‘지어낸 거 아냐?’ 하고 의구심이 든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열심히 위로해준다. “너무 억지로 잊으려고 애쓰지 마. 그녀도 그런 건 원치 않을 거야.” 타자를 치는데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가 한 이야기가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어 번개를 제안한다. 그는 말한다. “나 사실 여자야. 당신보다 어려. 22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전부 예전 애인이 자기에게 한 말이란다. 나이 많은 옛 애인을 흉내 내는 젊은 여자. 설마 이것조차 거짓이 아닐까? 나는 더 큰 호기심을 느낀다. “언제든 술 마시고 싶으면 연락해”라며 내 실명과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준다. 10번 타자는 “연락할게, 꼭”이라 말하지만, 아무래도 연락이 올 것 같지는 않다. 현재 동시 접속자 3173명. 익명의 놀이터는 새벽에도 잠들지 않는다.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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