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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의 동정을 탐하지 마라

영국 드라마 <트리니티>
등록 2009-12-31 10:58 수정 2020-05-03 04:25
영국 드라마 〈트리니티〉

영국 드라마 〈트리니티〉

인간은 참 요상한 동물이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등골이 으슬으슬해지면 실없는 농담을 뱉어낸다. “야, 사실 우리 중 하나가 귀신이었던 거 아냐?” 또 좋다고 받아준다. “허허, 그러게. 나중에 그놈 잡으면 다리를 분질러줘야지.” “야, 귀신은 다리가 없잖아.” 으하하하, 웃음이 터지고 그 웃음이 식을 즈음에는 등골이 더 서늘해져 있다.

코미디의 한쪽 세계는 스릴·호러·서스펜스에 발을 푸욱 담그고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와 라스 폰 트리에의 이 그랬고, 역시 이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온탕·냉탕의 재미를 전해줄 존재가 나타났다. 케이블TV ‘패션앤’이 영국 에서 2009년 9월부터 방영한 8부작 시리즈를 재빨리 가져왔다. ‘에로틱 캠퍼스 스릴러’라고 카피를 달았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세 축 중 하나를 코미디로 바꿔야 성스러운 삼위일체가 완성될 것 같다.

명문 기숙사제 기독교 학교 ‘트리니티’. 겉으로는 온갖 허세를 떨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의 미친 학교다. 학교에 새로운 여학장과 신입생들이 들어오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학교 안은 ‘민들레클럽’이라는 귀족 부유층들의 손아귀 안에 있다. 클럽의 회장인 미소년 도리안(에서 온 건가)은 심심하면 벌거벗은 채 나타나며, 학생·하녀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고 다닌다.

새로 들어온 서민 학생들이 또 하나같이 가관이다. 여주인공인 샬롯은 수석을 놓친 과목의 만점자인 테오를 티파티에 초대하는데, 골수 기독교 친구들이 어두침침하게 앉아 있다(‘덕후’ 캐릭터는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나 있었던 것 같다). 민들레클럽은 신입생이 들어오는 날 전통의 ‘바보들의 파티’를 여는데, 앵거스와 라이는 자진해서 바보 역을 맡는다. 그러곤 파티에서 자기 얼굴을 알리면 빨리 동정을 뗄 수 있다고 여기고 온몸을 바친다. 쓰레기 수레에 갇혀 오줌 세례를 받으면서도 담배를 나눠 피우며 행복해하는 진짜 바보들이다. 농구 선수 같은 외모의 흑인 테오는 그나마 이성적인 학생. 이 학교가 미쳤다는 걸 금세 알고 짐을 싼다. 그러나 그때 도리안의 사촌인 로잘린이 유혹한다. “너 왕위 계승 서열자하고 해봤어?” 창문을 열고 이 학교에 너무 잘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오해가 있을지 모르지만, 드라마의 축은 미스터리다. 샬롯은 이 학교에 다니다 갑자기 그만둔 아버지의 과거를 밝히고 싶은 궁금증이 있고, 신임 학장은 샬롯의 아버지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애써 부인한다. 학교의 교수진은 어둠 속의 누군가로부터 명령을 받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 때문에 학생들의 광란과 일탈을 적당히 봐준다. 드라마는 같은 발랄한 분위기에서 점점 어두침침하고 기괴하게 바뀌어갈 것 같다. 그러나 이 귀여운 영국제 미친것들이 만들어내는 발작적인 웃음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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