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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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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몰라’하는 집요함


점잖은 척은 절대 못하는 감독 이준익, 논쟁적이지만 이기려 하지 않는 그의 ‘살아남기’
등록 2009-12-16 11:38 수정 2020-05-03 04:25
감독 이준익.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감독 이준익.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이준익(50) 감독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게 3년 전, 영화 의 개봉을 앞두고였다(그때 나는 영화담당 기자였다). 둘이 서울 인사동의 ‘이모집’에 갔다. 불고기와 전에, 소주와 백세주를 반씩 섞은 ‘오십세주’를 시켰다. 그 무렵엔 이 감독과 워낙 자주 만나서 기자 대 취재원이라는 긴장감이 다 허물어지다시피 했다. 또 그런 인터뷰, 나도 재밌게 봤고 그도 흡족해하는 영화를 두고 하는 인터뷰에선 둘 다 마음이 쉽게 풀어지게 마련이다.

이준익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독설도 심하다. 세상의 권위와 기득권층의 행태 같은 걸 비난할 땐 말이 하늘을 난다. 그건 전부터 알았지만, 그날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말을 적으면서 내가 간간이 끼어들었다. “이 말은 좀 센데….” 그러면 그는 “그래? 그럼 그건 빼자”며 한발 물러선다. 그래놓고 이내 다음 표현이 또 세진다. 나중에 정리할 요량으로 실컷 떠들고 술도 제법 마셨다.

나도 독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는 기자였다. 그의 말맛은 충분히 살리되 문맥을 흐트러뜨릴 만큼 과한 표현만 조금 다듬었다. 그 기사에 이런 말들이 나온다. “나는 영화의 미학적 기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추구한다. …미학적 기능을 추구할 의지는 아예 없다.” 영화감독이 미학적 기능을 추구할 의지가 아예 없단다. 이런 말도 나온다. “지식이 감동을 주는 걸 봤는가. 감동을 주는 건 행동이다. 행동주의자가 없으면 지식인들은 밥 굶는다. …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해본 적이 없다. 학력도 떨어지고. 아이큐도 97이다. 예비고사는 (340점 만점에) 160점을 맞았고.”

인터뷰할 때 내가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큐 97이라고 써도 돼?” 그의 말. “써, 써. 예비고사 점수도 써.” 전작 로 성공한 감독이 됐으니, 후진 아이큐와 시험 성적을 공개해봤자 평가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질 리 없다는 생각? 내가 보기엔, 그런 ‘잔머리’가 아니라 그에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먼저 밝혀야만 직성이 풀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남들이 자신을 ‘점잖은 지식인’으로 대접하는 게 마치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모양이다.

그가 젊을 때 고생했던 얘기는 어지간히 알려져 있을 거다. 대학 1학년 때 애를 낳아 먹고살려고 만평 작가, 극장 간판 그리는 일 등을 (한 게 아니라) 하려다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만 듣고 못하고, 빌딩 경비원 일도 힘들게 얻어 겨우 하고, 잡지사 일러스트를 하다가 영화사 광고기획 쪽에 발을 디디게 되고…. 8~9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씨네월드’라는 회사를 차려놓고 영화 제작과 수입을 하고 있었다. 빚이 많아, 그는 ‘재테크’ 아닌 ‘빚테크’라는 신조어를 쓰며 ‘빚은 나의 힘’이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특이한 건, 당시 충무로엔 끼리끼리 뭉쳐다니는 그룹들이 있었는데 그는 섬처럼 자기 회사 사람들과만 놀았다. 기자를 대하는 태도도 남달라, 여차하면 “영화 볼 줄 모른다” “기사 못 쓴다”라며 기자를 가르치려고 했다. 성장 과정 면에서나, 성격 면에서나 아웃사이더인 건데 그는 논쟁적일지는 몰라도 결코 전투적이지는 않다. 누구와 논쟁이 세게 붙으면 다른 쪽으로 얘기를 돌리거나 피해버리지, 언성 높여가며 이기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가끔씩 말을 장황하게 하다가 꼬이면 “몰라, 몰라” 하며 말을 포기해버린다. 아이큐가 97이라는데, 머리가 좋아서 책을 3분의 1 정도만 읽고도 필요한 말들을 뽑아서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스타일이다.

4년 전 시사회가 있던 날, 한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그는 시사회장 반응에 ‘업’돼 큰소리를 쳤다. “(관객) 300만 명이야.” 크게 잡은 예상치가 300만 명이었던 게, 1천만 명이 넘은 뒤 그는 한 시상식장에서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많이 볼 줄 알았으면 좀더 잘 만들걸 그랬어요.” 그렇게 기적적으로 스타가 된 뒤에도 그는 별로 안 변했다. 독설은 되레 더 심해졌고, 자기 빚은 갚았지만 옛 ‘씨네월드’ 동료들 빚이 남아 아직도 ‘빚테크’ 중이라고 했다.

‘그럼 말고’ ‘몰라, 몰라’ 하는 말투를 보면 그가 싫증을 잘 낼 것 같지만,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일에 관한 한 그는 매우 집요한 모양이다. 이후로 만든 영화들이 흥행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영화를 찍고 있다. 지금 충무로의 열악한 투자 환경에서 수십억원대 예산의 영화를 이렇게 계속 찍고 있는 감독도 드물다. 엊그제 촬영을 마쳤고, 내년 4월에 후속편인 을 크랭크인하기로 하고 투자까지 받았단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고 하잖아. 우리가 또 살아남는 데는 귀재거든.”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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