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평일엔 ‘집→회사→국회(→술집)’만 오가며 기사와 독자(와 술)만 생각하는 성실한 직업인, 휴일이면 왼손에 리모컨, 오른손엔 책을 쥔 채 침대와 한 몸이 돼 시간을 보내는 ‘재고녀’. 친구들 죄다 결혼 혹은 연애를 시켜버린데다 무면허 신세지만, 틈틈이 혼자 쏘다니는 즐거움도 없지는 않았더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숨겨둔 애인’이자 ‘영혼의 안식처’인 제주로 도보여행을 다녀온 지 3주 만에 지리산을 간 게 화근이었다. 멍 때리며 걷고, 살랑대는 바람에 웃고, 비안개에 젖은 초록의 오름에서 온몸을 적시는 비에 상쾌해져 콧노래를 불렀던 비현실적인 행복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약’을 맞았다. 이번엔 더 셌다. 지리산 자락 마을의 황금빛 다랑논, 생전 처음 보는 수수밭, 발에 차이는 밤송이, 문패처럼 집집마다 서 있는 대추나무·감나무는 오히려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눈을 들면 들어오는 겹겹이 포개진 산봉우리와 운무는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았다. 세석부터 천왕봉까지 들어내 집 앞으로 데려오고 싶었고, 중산리로 내려오는 길엔 아쉬운 마음에 급기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아아, 다시 성실한 직업인으로 돌아온 그날 아침. 지하철 창밖의 무뚝뚝한 한강철교와 아파트·빌딩이 그려내는 스카이라인은 이물감 그 자체였다. 신문이나 보도자료를 읽어도, 회의를 하고 취재를 하는 동안에도 상대의 말과 글은 외계어였다. 지금껏 휴가 후유증에 시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일상이 일탈로 느껴지느냔 말이다.
그러다 문득 ‘돈오’가 왔다. 다른 건 눈앞의 풍경만이 아니며, 내가 그리워하는 것 역시 그 풍경만은 아니라는 사실. 잘났다 못났다 스스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 안달하지 않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자연스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되뇔 수 있는 시간. 끝없이 내몰았던 스스로를 그냥 바라보고 보듬고 등 도닥이는 일. 바로 내가 나일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이 본질이었던 거다.
제기랄,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부터다. 이미 한번 든 바람은 깨달음 이후에도 잦아들지 않는다. 전쟁 같은 마감 시간에도 마우스는 오대산 산행기, 경주 도보여행기를 클릭하고 있고, 머릿속엔 온통 ‘이번 주말엔 강화도를 갈까, 관악산을 갈까’뿐인 거다. “그녀와 단둘이 세상 가장 밝은 낙원으로 가는 아침 산책길”(이지형 ‘산책’)이 아니라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김동률 ‘출발’) 떠나고 싶은 거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놀고만 싶은 거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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