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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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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도 개혁도 아닌 ‘제3의 길’?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
불합리한 삶에 대한 몸부림으로 주인을 살해했다면 혁명인가, 살인인가?
등록 2009-09-25 10:29 수정 2020-05-03 04:25
〈화이트 타이거〉

〈화이트 타이거〉

억압적 사회체제, 끝이 보이지 않는 부정부패의 만연. 이런 상황에서 혹자는 혁명을 주장하고 혹자는 개량을 말한다. 일시에 근본적으로 사회구조를 변혁할 것인가, 혹은 점진적으로 잘못된 점을 고쳐나갈 것인가는 사회의 모순을 몸으로 겪고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두 가지 방법이 전부일까? 기자 출신의 인도 작가 아라빈드 아디가는 전혀 엉뚱한 ‘제3의 길’을 제시해서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그의 데뷔 소설 에 등장하는 뜻밖의 방법, 그것은 살인이다.

이 책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인 발람 할와이의 별명인 ‘화이트 타이거’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인도 사회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부패의 사슬은 발람이 다니는 학교에도 존재한다. 담임은 학생들의 급식 보조금을 횡령하고 정부에서 지급한 교복을 팔아먹는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담임을 비난하지 않는다. 교육부 공무원이 중간에 착복을 했는지 담임도 여섯 달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도 피해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담임은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수업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대부분의 학생들은 글을 읽을 줄도 모른다.

어느 날 학교에 장학사가 찾아온다. 마땅히 있어야 할 비품이 없고 학생들이 글도 못 읽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장학사에게 담임은 발람을 시켜보라고 말한다. 발람은 장학사가 지적하는 글을 훌륭히 읽어내고 질문에도 정확히 대답한다. 그런 그에게 장학사는 ‘화이트 타이거’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한 세대에 딱 한 번 나타나는 희귀한 존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이 험한 정글을 헤쳐나갈 능력이 있었다. 장학사는 그에게 이라는 책을 주면서 ‘진짜’ 학교에서의 ‘진짜’ 교육을 약속하고 떠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질곡

물론 인도 사회는 발람이 인간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촌누이가 결혼하자, 신랑에게 허리가 휘도록 지참금을 줘야 하는 인도 풍습에 따라 발람의 가족은 마을 지주에게 거액의 빚을 진다. 지주는 발람의 가족 전체가 일을 해서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고, 발람은 학교를 그만두고 찻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진짜 교육을 약속받았던 화이트 타이거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인력거꾼인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 거의 확실해진 그의 유일한 꿈은 운전기사가 되는 것이다. 는 이런 발람이 억압의 굴레를 끊고(!) 어엿한 기업가(!)가 되는 이야기다.

헤어날 수 없는 빈곤과 불합리에 시달리는 이들의 저항권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 버려진 대형 수도관을 집으로 삼은 인도 뭄바이 슬럼가의 가난한 가족. 사진 REUTERS/ PUNIT PARANJPE

헤어날 수 없는 빈곤과 불합리에 시달리는 이들의 저항권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 버려진 대형 수도관을 집으로 삼은 인도 뭄바이 슬럼가의 가난한 가족. 사진 REUTERS/ PUNIT PARANJPE

소설은 자못 경쾌하고 가볍게 시작한다. 라디오에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인도를 방문한다는 뉴스를 들은 발람은 그에게 편지를 쓴다. 책 전체가 원자바오에 대한 발람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을 ‘기업가인 동시에 생각하는 인간 화이트 타이거’라고 소개하는 발람은 인도의 기업가에 대해 배우고 싶으면 자수성가형 기업가인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편지에서 발람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설명하면서 인도 사회의 실상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한다. 비참한 하층민의 생활까지도 너무나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 독자들은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기 어렵고 때때로 데굴데굴 구르게 된다. 물론 현실의 상황은 결코 웃어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찻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발람은 가족의 도움으로 운전을 배우고 우여곡절 끝에 자가용 기사로 취직을 한다. 결코 평등한 사회라고 보기 어려운 인도에서 운전기사의 할 일은 운전만이 아니다.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발마사지와 술심부름도 한다. 하인 또는 노예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역할이다. 우연인지 혹은 필연인지 그의 ‘주인’은 과거 그로 하여금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었던 지주의 아들 아쇽이었다. 그를 모시고 다닌 지 여덟 달 뒤, 발람은 아쇽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현실이 으레 그렇듯이 젊은 주인 아쇽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악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사회의 모순에 눈을 찌푸리기도 하고 하층민의 삶에도 관심을 가진다. 발람의 방을 찾아와서는 프라이버시를 누릴 수 있는 좀더 나은 환경을 약속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아내 핑키에게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사업을 위해 정부 관리에게 뇌물을 가져다줄 때는 진심으로 후회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한마디로 착하고 인간적인 고용주인 것이다.

이런 아쇽을 보면서 발람은 그가 하는 일을 흉내내고 따라하게 된다. 아쇽이 입은 옷과 비슷한 옷을 걸치고 주인의 단골인 나이트클럽에 출입해 동료 기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주인의 아내인 핑키에게 욕정을 느끼기도 한다. 심지어 아쇽이 부패한 공무원의 소개로 만난 킴 베이신저를 닮은 백인 여자와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저금을 모두 털어 금발 아가씨를 사기도 한다(물론 하인이 주인과 같을 수는 없다. 발람이 만난 여자의 금발은 염색이었다).

착한 주인 밑에서 그나마 살 만하다 싶었건만

발람의 이런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돈과 권력, 아름다운 여인들과 심지어 약간의 양심까지 모든 것을 갖춘 아쇽의 삶은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발람의 인생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다. 원래 발람의 집안은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과자를 만드는 계층에 속했다. 그런데 영국의 지배가 끝나고 공식적으로 카스트제도가 붕괴되면서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하자 그마저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발람의 아버지가 인력거꾼으로 비참한 인생을 마친 것은 카스트제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카스트제도의 붕괴로 인한 것이다.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도 잃어버린 발람의 가족들은 서로 뜯어먹기에 혈안이 된다. 발람의 운전 교습비를 대주었던 할머니는 발람에게 끊임없이 수입의 대부분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인생이다.

발람은 희망 없는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주인을 살해하고 강탈한 돈으로 기업인이 된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홍보 포스터가 나붙은 인도 뭄바이 외곽의 빈민가. 사진 REUTERS/ PUNIT PARANJPE

발람은 희망 없는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주인을 살해하고 강탈한 돈으로 기업인이 된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홍보 포스터가 나붙은 인도 뭄바이 외곽의 빈민가. 사진 REUTERS/ PUNIT PARANJPE

그 자신이 오랫동안 비참한 경험을 했던 조지 오웰은 그 시절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 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볼 때는 증오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나도 돈을 모으면 저 사람 흉내를 내게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발람이 ‘좋은 주인’ 아쇽을 따라하는 것은 그러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아쇽이 되기 위한 발람의 처절한 노력은 무위로 그치고 만다. 주인과 하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차이는 한 사건을 통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어느 날 밤 아쇽과 핑키 부부는 발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데이트를 즐긴다. 기분 좋을 정도로 술에 취한 핑키는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발람을 뒷좌석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린아이를 치어 죽이는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다. 다음날 아쇽의 동생은 발람을 불러서 종이 한 장을 내민다. 그 종이에는 사고를 낸 것이 자신이라는 발람의 자백이 적혀 있다. 발람은 ‘인간적인’ 주인의 아내를 위해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다.

주인이 발람에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은 발람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안전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쇽과 발람은 같은 마을 출신이고 아쇽은 발람의 가족을 잘 알고 있다. 만일 발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이 복수를 당한다.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남자들은 모조리 죽을 것이다. 발람은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발람의 가족들은 이 일을 오히려 기회로 여긴다. 발람은 주인을 위해 희생을 할 것이고, 가족은 그 보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통사고는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묻혀 넘어가지만, 이 일을 계기로 발람은 그가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거미줄, 주인과 가족의 굴레에 묶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발람은 태우고 가던 아쇽을 살해하고 정부 관리에게 줄 돈을 훔쳐 달아난다. 주인은 죽었고 발람을 돈 버는 기계쯤으로 여기던 가족들은 살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발람은 그 돈으로 운수회사를 차려 ‘기업인’이 된다. 화이트 타이거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해서 마침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게 된 것이다.

혁명은, 당연한 일이지만 불법이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뒤엎는 일을 법이 용납할 리 없다. 혁명은 폭력적인 것이고 진행 과정에서 사람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처벌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 구조 자체가 극도로 억압적이고 통상의 방법으로는 변화가 불가능할 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무조건 실정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노예의 반란을 일반적인 불법행위와 같이 볼 수 없는 것이다. 저항권이라는 개념이 널리 인정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은 어떨까? 주인을 위해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주인처럼 되고 싶어했던 발람은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감옥에 가야 한다. 그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가족은 그와 함께 변화를 도모하기는커녕 그런 상황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고 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고, 아마도 그는 평생 인력거꾼으로 일하다가 병에 걸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 그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가장 원초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저지른 살인은 과연 혁명과 엄청나게 다른 것일까?

살인, 인간다운 삶을 살려는 욕망을 따랐을 뿐?

잘 살아보려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든 변희재의 ‘실크세대’든(한쪽은 나름의 논리 체계를 갖추고 있고 다른 한쪽은 황당무계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명예훼손 소송을 피하기 위해 어느 쪽이 황당한지는 밝히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세대론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그것이 기성세대의 사과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청년실업을 비롯한 젊은 세대의 고난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임이 틀림없지만, 나름의 질곡을 헤치고 나온 윗세대에게 무조건 잘못을 인정하라고 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발람이 저지른 행동은 살인이고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여기서의 살인은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뜻하는 하나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비록 살인은 아닐지라도 발람과 같은 행동을 한다. 나만이라도 살아보자는 본능적인 욕구와 그에 따른 수많은 몸부림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과연 발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발람으로부터 솔직한 편지를 받은,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 각하는 과연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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