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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 전문가 되는 법

등록 2009-06-25 17:50 수정 2020-05-03 04:25
‘간지’ 전문가 되는 법. 사진 미들즈브러/AFP 연합

‘간지’ 전문가 되는 법. 사진 미들즈브러/AFP 연합

우리 팀 막내(라고는 하지만 31살)는 시크한 도시인을 (마음으로만) 지향하는 남자다. 서울 홍익대 근처에 거주한다고 경기 고양시에 사는 선배들을 ‘행신댁’ ‘화정댁’이라 부르며 나름 ‘핫한’ 동네에 사는 걸 과시한다. 얼마 전 2주간 유럽에 다녀와서 ‘런던에서는, 바르셀로나에서는…’을 맥락과 상관없이 읊조려 빈축을 사고 있다. 맥북과 미니벨로를 애호하는 그는 맥북카페에서 된장스러움을, ‘듀게’(‘듀나의 영화낙서판’의 게시판)에서 ‘스놉한’ 정신을 수혈하며 ‘간지남’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다. 한편 밤새 유로축구를 보고 회사에선 업무상 통화할 때 상대에게 ‘어디 아프세요’란 말을 듣곤 한다. 스포츠에 무지한 여자 선배들에게 야구와 축구에 대해 전문가연하는 걸로 ‘간지’를 완성하는데, 이때 포인트는 상식적으로 아는 수준을 살짝 넘어서는 고유명사를 읊어대는 것이다. 가령 월드컵 예선 이란전에서 박지성이 한 골 넣은 이야기를 할 때, 박지성과 친한 에브라(사진) 이야기를 꺼내는 식이다. 모르는 이름이 나오면 상대는 위축되는 법. 대화는 중단되고, 혼자만의 장광설이 이어진다. 물론 억센 누나들은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대신, 밤에 케이블 시청 그만하고 출근이나 일찍 하라고 한 방에 제압한다.

전문가처럼 보이는 게 시크한 도시남녀의 아우라를 더해주는 건 사실이다. 진짜 전문가가 되기 어렵다면 전문가로 ‘보이는’ 매뉴얼을 익히면 된다. ‘듀게’에 쏠쏠히 올라오는 ‘당신을 ○○ 전문가로 만들어드립니다’라는 제목을 단 글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축구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뉴얼만 숙지하면 됩니다. 클래식 레벨에선 펠레와 마라도나를 꼽아선 안 됩니다. 다른 축구 전문가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매뉴얼은 마르코 반 바스텐이나 플라티니 정도입니다. 요즘에는 호날두보단 피를로를 추앙해야 합니다. 이도저도 다 싫으면 주니뉴 정도 추천드립니다. 맨유·첼시·레알, 이런 팀은 꼽지 마십시오. 리버풀·로마·아틀레티코, 이 정도 가능합니다. 국가는 아르헨티나 강추. 박지성 맨유 가고 나서부터 유로축구 봤다고 절대 고백하지 마십시오. ‘캐무시’당합니다.”

듀게 회원들은 ‘고클래식’이라는 사이트에서 퍼온 ‘당신을 축구 전문가로 만들어드립니다’라는 글을 시작으로, 클래식·커피·문학·미국 프로농구(NBA)·추리소설·건프라·AV 등 다양한 분야로 패러디하며 전문가 매뉴얼을 확장하고 있다. 얄팍한 지적 허영심을 비꼬기도 하고,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도 하면서 정보와 위트를 버무려 유쾌한 놀이를 만들어낸다.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처럼 보이는 공통 기술을 추리면 이렇다. 너무 대중적인 걸 꼽아선 안 된다. 까탈스럽고 세련된 취향을 드러낼수록 좋다. 질문이 들어오면 더 어려운 질문으로 막아낸다. 무엇보다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싼 티’ 나선 안 된다. 보고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거나, 스타벅스 캐러멜 마키아토 먹고 커피에 관심 생겼다고 하는 건 금물이다. 가장 중요한 건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 잘못하면 ‘캐무시’당한다.

김송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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