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과 한국방송 경영진의 시각차. 사진 KBS 구성작가협의회 제공
한국 사회에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 같은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1992년, 내 아버지는 15년간 근무하던 회사에서 갑자기 쫓겨났다.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동료들이 한꺼번에 실직자가 돼야 했던 당시 상황을, 아버지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한파가 불어닥친 5년 뒤에야 “그러니까 내가 명예퇴직을 한 거였군”이라며 납득했다. 그 5년 동안 아버지가 불면의 밤을 보낸 까닭도 밝혀졌는데, 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대한 회사 쪽 대표의 답변 때문이었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을 대졸 사원 몇 명이 나눠 하면 ‘가욋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단다. 당신이 15년 동안 한 일이 ‘가욋일’로 치부되고 별 쓸모 없는 존재로 취급받은 그 모욕의 순간을, 아버지는 결코 잊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명예퇴직은 실로 중대한 명예훼손 퇴직이었던 것이다.
한국방송이 일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대해 ‘PD 집필제’를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방송작가’라는 한 직업군으로 분류되지만, 프로그램 장르에 따라 작가들이 하는 일은 몹시 다르다. 한 원로 작가는 “한국의 방송 제작 시스템은 ‘작가―PD 협업’ 체제로 나름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갖춰왔고, 협업 방식은 프로그램 장르와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방송가에선 ‘PD 집필제’가 드라마 등 다른 장르로 확대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같은 시사·교양 장르 안에서도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고들 한다. 한 드라마 PD는 “경영진이 내게 충무로 감독들처럼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도 해서 제작비를 절감하라고 한다면, 그 감독들처럼 5년에 한 편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되묻겠다”고 했다. 인력이나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PD 집필제 반대 성명에 참여한 한 라디오 작가는 “PD 집필제가 전면 도입될 것을 염려해 성명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작가들이 하던 일을 PD들이 밤잠 좀 줄이면 되는 ‘가욋일’로 여기는 그 발상 자체가 황당하고 모욕적”이란다. 한국방송 경영진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고작 몇몇 PD들의 밤잠을 줄이는 안을 내놓은 것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PD 집필제’를 입에 담는 순간, 심각하게 훼손된 작가들의 명예는 어찌할 것인가.
다행히 요즘 검찰이 방송 관련 명예훼손 문제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검찰은 문화방송 〈PD수첩〉의 광우병 보도가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했는지 끈질기게 조사한 끝에 기어이 제작진을 기소하고야 말았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검찰이 한국방송 경영진과는 반대로,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에서 작가의 역할과 비중을 몹시 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작가의 소소한 상념 한 자락조차 방송 제작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 〈PD수첩〉 작가가 지인들에게 보낸 개인 전자우편까지 낱낱이 공개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토록 중요한 작가 없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노라 선언한 한국방송 경영진은 무모한 걸까, 무식한 걸까.
이미경 블로거·mad4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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