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한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맹렬히 공격하고 며칠 뒤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남장여자 정치인 김옥선 전 의원 이야기다. 그는 일제 때 징용 가서 죽은 오빠를 어머니가 그리워하자 1950년대에 처음 남장을 했고, 열아홉에 시작한 사회사업과 정치를 위해서 평생 남장을 고수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감추고 살아가기엔 너무도 억울한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기 위해서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에서 신윤복이, 에서 소서노가, 에서 덕만이 가슴에 붕대를 감았던 것이다.
사극이 아닌 현대물에도 ‘남장여자’가 종종 등장한다. 의 고은찬은 남자만 고용하는 카페에 취직하려고, 의 고미녀는 쌍둥이 오빠를 대신해 남성 아이돌그룹의 멤버가 되려고 남장을 했다. 여성도 당연히 대학에 가고 직장을 다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장여자가 흥미로운 소재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드라마 작가는 “남성 커뮤니티에 잠입한 여성이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한다는 설정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라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상당히 탈피했지만 여전히 여성은 알게 모르게 불평등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배려든 차별이든 여성이기에 받는 대우를 벗어나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성이기 이전에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남성에게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인간 대 인간으로 남자들과 지낸다면 무슨 상호작용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드라마 속 남장여자는 남성적인 겉모습을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기회를 얻고, 남자들의 일상에 편입돼 생활하는 동안 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강점과 살짝 감춰둔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십분 활용해 진실한 사랑도 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방송가에서 남장여자는 드라마의 영역, 여장남자는 코미디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성장과 성공, 연애담을 주로 다룬다. 남자가 여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없다. 드라마 안과 밖에선 남자가 자신의 커리어와 성공을 위해 여장을 하고 여성 커뮤니티에 굳이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한 번쯤 되새겨볼 일이다. 여자는 남장을 하되 남자는 여장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여자들이 ‘21세기형 남장’을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에서 남장여자 고미녀는 불과 2회 만에 정체를 들켜서 남자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작에 깨지고 말았다. 드라마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짜임새도 탄탄하지만, 고미녀가 남자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민폐형 신데렐라’이자 ‘캔디’로 머물게 된 건 좀 씁쓸하다.
김현정 블로거·mad4tv.com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차기 대통령, 이재명의 민주당 아닌 ‘민주당의 이재명’이라야 된다
“그냥 정우성 ‘아들’이다…‘혼외자’는 부모 중심적 언어”
[단독] 명태균, 김건희 만나기 전 ‘면접’…공천 의혹 조은희 의원 거쳤다
소속 없이 모인 청년들 ‘윤퇴청 시국선언’ 2000자 울림
이 풍경이 한국이라니…12월 여행 후보지 3곳
우크라 “한국이 1396억 차관 제공”…무기지원 신중론 짙어지나
이번 달 170만원 떼임…과일도매 서러운 ‘1000원 떼기’ 장사 [.txt]
민주,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여야 ‘감세 짬짜미’ 비판 직면
[단독] 김영선의 증거 은닉처, 창원산단 투기 의혹 ‘동생 집’이었다
박찬대 “대통령실·검찰 특활비 없앤다고 국정 마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