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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kimuchi’

등록 2009-08-21 18:56 수정 2020-05-03 04:25
정우성의 ‘kimuchi’

정우성의 ‘kimuchi’

‘강택민’은 ‘장쩌민’, ‘사천성’은 ‘쓰촨성’이 되었다. ‘동경’ 또한 ‘도쿄’로 사용한 지 오래며,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는 어색하게도 ‘도스토옙스키’와 ‘차이콥스키’로 바뀌었다. 실제 그 언어를 사용하는 현지인의 발음에 가장 근접하게 표기하기 위해 맞춤법이 개정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쓰시마’를 여전히 ‘대마도’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 정우성이 일본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을 대표하는 완전 소중한 음식 ‘김치’를 ‘kimuchi’라고 쓰는 바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정우성은 ‘빛의 속도’로 ‘김치를 기무치라고 쓰는 개념 없는 연예인’으로 불리며 무개념 연예인의 자리에 오르고 말았다. ‘kimuchi’라고 쓴 것은 프로그램 제작진이며 정우성은 하단에 사인만 했다고 소속사가 거짓 해명을 늘어놓아 사태는 더 커졌다.

그러나 일본에서 귀국한 정우성이 긴급히 ‘반성문’을 올렸다. 내용인즉슨, 프로그램에서 제공한 답안 4개 중 하나를 그대로 옮겨 적는 과정 중에 발생한 어이없는 실수이며 자신의 불찰과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건은 진정 단계로 넘어갔다.

정우성은 과연 불찰과 과오를 저지른 것일까? 일본 방송에 출연해 일본인 제작진이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답안으로 제시한 단어를 보고, 정우성이 즉석에서 ‘kimchi’로 고쳐야 한단 말인가?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축구나 야구 한-일전에 임할 때 선수들은 말 그대로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결연해지고, 혹 패배하면 아무리 열심히 뛰었더라도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국민 여러분을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를 반복한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핍박, 반인권 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최선을 다해 경기한 선수가 죄인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나라의 예능 프로그램이나 외국어 맞춤법 표기 문제까지 간섭하는 건 ‘오버’라고 본다. 일본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한국을 왜곡했다면 당연히 엄중하게 항의해야겠지만, 이번 정우성 사건의 경우는 아무래도 좀 지나치다 싶다. 일본에서 김치는 ‘기무치’이고 대마도는 ‘쓰시마’다. 정우성이 ‘kimchi’라 썼다고 애국지사가 아닌 것처럼 ‘kimuchi’라 썼다고 매국노는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국내 대중문화와 방송 분야에서 일본 콘텐츠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일본 문화 콘텐츠가 개방되면서 노골적으로 베끼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슬그머니 갖다 쓴 뒤 들통 나면 발뺌하거나 뒤늦게 저작권료를 지급했다고 해명하는 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 문화를 얕보는 게 싫다면, 이렇게 촌티 풀풀 나는 행동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또 한 가지, 만약 국내에서 북한과 옌볜, 동남아 지역 사람들을 여전히 코미디 소재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 나라 사람이 다투어 항의한다면 어쩔 것인가? 언제나 내 눈의 들보를 거둬내는 일이 더 어렵다.

김현정 블로거 www.mad4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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