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영화·드라마에서 여배우의 일생은 대략 이렇다. 20대엔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캔디나 청순가련한 신데렐라로 만인의 연인이 된다. 30대엔 성격이 모나고 까다로워서 결혼 ‘못한’ 노처녀로, 고단하지만 아직은 희망찬 삶을 이어간다. 40대엔 억척 아줌마 혹은 자기희생적인 엄마가 되고, 마침내 ‘막장’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로 늙어간다. 이 과정에서 노처녀까지는 주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나머지 경우는 대개 조연으로 나온다.
40대를 바라보는 ‘언니’들은 가뭄에 콩 나듯 주연을 맡더라도 20대 때 역할과는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상큼 발랄한 청춘의 상징 최진실은 ‘아줌마파마’를 하고 헐렁한 옷차림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광고계를 주름잡으며 ‘광고배우’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받았던 김남주도 극성스럽고 코믹한 아줌마로 돌아왔다. 가수로선 여전히 섹시한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는 엄정화가 에서 구박데기 노처녀가 된 것은, 그러므로 이 한없이 단출한 ‘여배우의 일생’을 감안하면 순리요, 숙명인 셈이다.
덕분에 10년 넘게 톱스타로 이름을 날리는 여배우들은 갈수록 필모그래피가 화려해지긴커녕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다. 이영애는 불멸의 히트작 덕분에 중동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데, 몇 년째 후속작이 없다. 방송계 지인에게 물으니 “지난 몇 년 동안 이영애씨가 주연으로 나올 만한 드라마나 영화가 있었나 생각해보라”고 반문한다. “또래 배우들이 주로 하는 푼수 노처녀나 억척 아줌마로 이미지 변신을 해서 성공한다 해도, 그 다음 작품은 또 무얼 하겠느냐”는 것이다. 인기 상한가를 누리는 20대 여배우들은 경험이 부족해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고, 농익은 연기를 자랑할 30~40대 배우들은 이름값을 할 수 있는 배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남자 배우들은 30~40대에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김명민·김윤석·송강호·이병헌 등이 대책 없는 노총각이나 푼수 아저씨로 요약·정리되는 배역을 맡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인생사 희로애락이 성별에 따라 더하고 덜하지 않으련만, 영화·드라마 속 남자들의 일생은 여자들에 비해 역동적이고 복잡다단하다.
사람들은 ‘태희·혜교·지현이’가 허구한 날 광고만 찍어댄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광고계 배우 장동건이 같은 비난을 받지 않는 건 왜일까?) 하지만 ‘태희·혜교·지현이’가 배우로서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할지 생각하면 조금 답답해진다. 우리는 언제까지 김태희가 이영애가 됐다가 결혼 뒤 김남주로 돌아오는 모습만 보아야 할까?
심은하의 재림을 고대하는 팬들이 여전히 많다지만, 심은하가 ‘내조의 여왕’으로 부활해 ‘막장 시어머니’로 늙어가는 걸 보기 위해 굳이 집 밖으로 불러내고 싶진 않다.
김현정 블로거·www.mad4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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