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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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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생방송을 피하는 방법

등록 2010-02-02 15:11 수정 2020-05-03 04:25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는 빼놓을 수 없는 오락거리다. 인터넷 포털 뉴스 대문에는 언제나 드라마와 관련된 기사가 떠 있고, 현재 공중파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만 해도 스무 편이 넘는다. 영화나 컴퓨터 게임 같은 오락거리가 있지만, 드라마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폭넓은 계층에게 가장 손쉬운 여가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드라마 제목이나 기획 의도에서 ‘아내’나 ‘유혹’ 같은 글자만 보아도 흠칫하게 되더니, 올 들어 새롭게 선보이는 드라마들은 다양하고 차별화된 소재로 산뜻한 출발을 보이고 있다. 비교적 참신한 소재와 탄탄한 만듦새를 자랑하는 드라마들이 꾸준히 인기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010년엔 개성 있고 재미있는 드라마들이 시청자의 여가 생활을 풍성하게 해주리라는 기대를 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한 드라마 제작자는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했다. “괜찮은 드라마가 10회 이후에 무너지는 꼴을 얼마나 더 봐야 현실을 알겠느냐”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선한 소재에 완성도 높은 연출로 호평을 받건, 비슷한 설정과 캐릭터에 제목만 다른 ‘막장’ 드라마건, 드라마 제작진의 고민은 똑같단다. 회당 70분씩 매주 두 편, 140분 분량을 만들어내야 하는 ‘십자가’를 지는 것. 영화 한 편과 맞먹는 분량의 영상을 일주일 안에 제작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한다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닌 것이 요즘 드라마판”이라고 했다.
한때 ‘사전 제작제’가 드라마의 만듦새를 보증하는 단어로 통용됐지만, 사전 제작한 드라마들이 두드러지게 완성도가 높거나 흥행 성적이 좋지는 않았다. 제작사로선 사전 제작을 하느라 돈은 돈대로 쓰고 방송사에서 편성을 받지 못해 회사 문까지 닫아야 하는 위험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시청자의 반응과 의견이 드라마 전개나 편성(16부작이냐 20부작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제작진이 아니라 시청률이다)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사전 제작’은 비현실적인 얘기다.

그러니 좋은 드라마를 제작·방송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드라마를 한 주에 한 편씩만 방송하거나 방송이 결정된 뒤 제작 기간을 최대한 길게 확보하는 등 다양한 시도로 제작진이 ‘드라마 생방송’만은 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많은 부분이 ‘편성’에 달렸다는 얘기다.

대중문화의 수준 제고니 한류의 지속성이니 하는 고차원적인 논의가 아니라, 당장 제작진과 배우들이 사고 없이 촬영을 마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제작 환경이 달라져야 한다. 최소한 드라마 1회당 방송 시간이라도 줄여야, 시청자도 행여 배우가 쓰러질까, 대본이 제대로 나왔을까, 드라마가 갈수록 재미없고 허술해지진 않을까 하는, 한국 시청자에게만 익숙한 걱정을 접어둔 채 즐겁게 드라마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김현정 블로거·mad4tv.com
*‘오프더레코드’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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