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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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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짜리 ‘편성 영업’

등록 2009-09-23 17:58 수정 2020-05-03 04:25

‘편성 영업’이라는 말은, 방송사들이 드라마를 직접 만들지 않고 외주 제작사들로부터 공급받아 방송하면서 생긴 방송가 신조어다. 드라마 제작사들이 준비 중인 드라마를 때맞춰 방송할 수 있도록 방송사와 편성 계약을 맺는 일이, 여느 제품 영업과 마찬가지로 치열하고 험난하다는 얘기다. 방송이 안 된 드라마는 무용지물이니 편성 여부가 불투명하면 일찌감치 접는 게 손해를 줄이는 길. 제작사들은 “편성 없이 제작 없다”는 모토 아래 기획 단계부터 전방위로 편성 영업을 벌인다.

〈탐나는도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탐나는도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제품도 없이 영업을 하자니 ‘보증수표’가 필요하다. 작가와 감독, 특히 배우들의 ‘이름’이 업계에서 유일한 보증수표로 통한다. 드라마의 운명을 좌우하는 귀하신 분들이고 보니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그러니 지난해 말, 톱스타 유치 경쟁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제작사와 ‘보증수표’ 타령하다 시청률 부도난 방송사가 손잡고 “배우들 출연료 때문에 드라마 산업이 위기를 맞았다”며 울고불고한 건, 시청자 입장에선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다. 우리가 언제 200억, 300억원짜리 드라마 보고 싶다 그랬니.

장사를 하려면 구색을 잘 갖춰야 한다. 히트 상품을 진열하는 건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다. 인지도는 적지만 좋은 상품을 잘 포장해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하면, 다양한 손님들이 가게를 찾을 테고 마진도 더 많이 남길 수 있다. ‘편성’은 프로그램의 구색을 갖추는 일이니, 방송사들의 편성 전략은 그들의 장사 수완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인 셈이다.

드라마 편성에 얽힌 뒷이야기를 듣고 나니 방송사들이 장사를 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스타 없이도 잘나가는 드라마를 꿈꿨던 제작진은 방송사를 설득하기 위한 ‘보증수표’로 미리 집필한 대본을 내밀었다. 방송사들이 “재미는 있는데…”라며 반신반의하자 4회 분량을 촬영·편집해 보여줬다. 극장 시사회를 열고 일반 시청자의 반응을 분석한 보고서까지 제출했지만 1년 동안 편성 계약을 하지 못했다. 색다른 제품의 품질을 판단할 안목도 배짱도 없는 방송사들 덕분에 고전하던 는, 결국 여름이 다 지날 무렵 ‘여름 특선’이라는 엉뚱한 부제 아래 문화방송 주말 드라마로 긴급 투입(전문용어로는 땜빵)됐다. 된장찌개 팔던 가게에서 스파게티를 먹는 듯한 시추에이션에 시청자는 영 적응할 수 없었고, 그럴듯하게 포장할 능력도 없는 가게 주인은 손님이 없다며 메뉴를 금세 바꾸겠다고 나섰다. 애초 구입한 20인분 재료를 16개 접시에 나눠 담느라 주방장은 진땀을 흘리고, 그나마 독특한 스파게티 맛에 매료된 소비자의 원성이 빗발친다. 돈은 못 벌고 평판은 나빠지고 새 메뉴에 대한 기대와 신뢰도 없으니, 대체 이걸 장사라고 할 수나 있을까.

이미경 블로거·mad4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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