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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빠지고 얼뜨고 얼치기 ‘얼’

등록 2009-06-11 17:42 수정 2020-05-03 04:25
얼빠지고 얼뜨고 얼치기 ‘얼’. 사진 온미디어 제공

얼빠지고 얼뜨고 얼치기 ‘얼’. 사진 온미디어 제공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도시들을 ‘구글 어스’에서 찾다 보면, 지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미친 마을들이 있다. ‘트윈픽스’ ‘사우스파크’, 의 스프링필드….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리스트가 생겼다. 의 캠던 카운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컨트리송으로 보아 남쪽 어디인 것 같은데, 그건 뭐 중요하지 않다. 만만찮게 촌스럽고, 만만찮게 미쳤다.

이 미친 마을의 한가운데에 주인공 ‘얼’이 있다. 이름대로 얼빠지고 얼뜬데다 얼치기다. 인생은 거짓으로 얼버무려져 있고, 좀도둑질로 연명해온 가계부는 얼기설기하고, 부인이 낳은 애들의 피부색까지 얼룩덜룩이다. 어느 모로 보나 똑바른 구석이 없는 이 친구가 어느 날 10만달러 복권에 당첨된다. 그러곤 기뻐 날뛰다 자동차에 치인다. 큰 복 뒤에 큰 재앙. 인생의 이 순간에 카르마(업보)라는 걸 깨달은 얼은 이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101가지 리스트’가 아니라, ‘새로 태어나기 위해 지워버려야 할 악행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어린 시절 줄기차게 괴롭혔던 동네 꼬마, 자기 대신 도둑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친구, 연애를 거는 척 자동차를 훔쳐 나온 외다리 여인… 작은 종이에 빽빽하게 써놓은 리스트들이 하나둘 등장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 동네엔 정상이다 싶은 인간이 거의 없다. 엉덩이에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문신을 새겼다며 보여주겠다는 남자나 유산을 받아내려고 전남편에게 인디언 활을 쏘는 여자가 지극히 평균치다. 얼의 동생인 랜디가 벼룩시장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성대가 안 좋아 기계로 말을 하는데, 랜디가 “루크, 내가 니 아비다”라는 영화 다스 베이더의 대사를 시켜보자 아무 생각 없이 해주신다. 이 할아버지는 이후에도 잠깐씩 등장하는데 정말 그 무표정에 얼이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해주는 모습이 배를 잡게 만든다.

얼의 분투는 헛다리 짚기 일쑤이고 긁어 부스럼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얼렁뚱땅 20분 정도의 짧은 에피소드 속에서 사건이 정리되는 게 참 신기하다. 사실 감동의 결론이야 뻔할 수 있지만, 그 사이에 우리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온갖 기행의 코미디로 살짝 정신착란 상태가 돼 있기에 재빨리 납득해버린다. 얘들이 이 정도라도 해낸 게 어디야?

사실 ‘카르마’라는 테마를 처음 접했을 때는 철 지난 ‘동양 페티시즘’인가 했다. 그러나 이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중추가 바로 이 업보들이다. 얼의 갱생 프로젝트에는 만만찮은 바보 동생 랜디가 함께하는데, 빈번한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이 형제의 과거가 계속해서 사건들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람기 많고 욕망에 충실한 전부인 조이가 사사건건 얼을 걸고넘어지는데, 생각해보면 그녀야말로 얼의 가장 큰 업보다. 이 정도면 카르마 중에도 하드코어인데, 얼은 조이의 새 남편인 순둥이 ‘크랩맨’과 가장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다. 얼이라는 이 사나이, 사실은 이미 부처인 게다. 다만 업보가 없으면 인생이 재미없으니 적당히 스펙터클한 업보를 만들어둔 거지.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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