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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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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문화계에 붐을 일으키다

각종 공연·문화예술 행사의 주된 소비층으로 떠오른 4050세대…
시장 세분화·다양한 연령층 참여 북돋는 기회
등록 2009-05-29 21:15 수정 2020-05-03 04:25

4050세대를 향한 문화예술계의 구애가 뜨겁다. 특히 베이비붐 시기(1955~63년)에 태어나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내며 민주화운동과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 세대에 대한 유혹이 거세다. 추억과 향수를 매개로 이들을 공연장과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는 다채로운 공연물들이 쏟아지는 중이다.

4050세대는 문화예술계에서 ‘블루칩’으로 통한다. 사진은 ‘카쉬전’을 보러온 중·장년층 관객.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4050세대는 문화예술계에서 ‘블루칩’으로 통한다. 사진은 ‘카쉬전’을 보러온 중·장년층 관객.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서울 공연을 끝내고 지방 순회 중인 뮤지컬 는 객석의 50% 이상을 40~50대들이 채우며 흥행에 성공했다. 통기타, 청바지, 롤러장 등 중·장년층이 기억할 만한 아이콘들을 끌어와 시간 여행을 하는 작품이다. 장기 공연 중인 뮤지컬 도 그룹 아바를 기억하는 중·장년층이 두세 번씩 다시 보는 공연으로 유명하다. 노래 이 무대를 채울 때면 공연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객석 절반 40~50대가 채우며 흥행 성공

연극 등도 중·장년층의 티켓 파워를 재확인했다. 는 문화계 전반에 나타난 ‘모성 신드롬’과 작품성이 검증된 장기 공연물이라는 면에서 흥행이 예상됐지만, 창작 초연작인 의 선전은 의외였다. 공연을 기획한 연극열전 쪽은 “늙어가는 남편과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아내의 이야기가 재미를 준 것 같다”며 “이 공연을 통해 창작 초연작도 중·장년층을 대학로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보험설계사인 권향숙(53)씨도 최근 뮤지컬 를 봤다. 직장 동료들과 자주 여가 생활을 즐긴다는 그는 “애 키우며 살다 보니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애들이 다 컸고, 또 돈을 직접 버니까 자식들 눈치 보지 않고 어디든 다닐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연극과 뮤지컬 외에도 해외 유명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은 중·장년층의 유입 여부에 따라 흥행이 결정된다. 10만원이 훌쩍 넘는 비싼 티켓값 때문이다. 5월26일과 27일 공연하는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내한공연이 이를 방증한다. 티켓링크의 현재 연령대별 예매율을 보면 여느 공연과 마찬가지로 30대(43.4%)가 예매율 1위를 점유한다. 하지만 40대가 20.6%, 50대가 7.2%의 예매율을 보이면서 20대 예매율(27.9%)을 치고 올라오는 중이다. 시니어 세대를 겨냥한 창극, 마당극 등이 아닌 경우 중·장년층의 예매율은 10% 미만에 그쳤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변화다.

이처럼 문화예술계가 20~30대 젊은 층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공연물을 통해 40~50대들을 껴안으려는 시도를 보인 건 왜일까? 이들이 ‘알짜 고객’이어서다. ‘문화 불모 세대’로 알았던 이들이 알고 보니 ‘노다지’였던 것. 티켓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INT 공연기획팀의 김선경 대리는 “지난해 티켓 판매량을 집계해본 결과 남성과 중·장년층의 예매율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중·장년 여성들을 위한 ‘11시 콘서트’를 열고 있다. 2004년 프로그램이 개설된 이후 매진 사례를 기록할 만큼 주부들에게 인기가 있다.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예술의전당에서는 중·장년 여성들을 위한 ‘11시 콘서트’를 열고 있다. 2004년 프로그램이 개설된 이후 매진 사례를 기록할 만큼 주부들에게 인기가 있다.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자신의 문화 정체성 드러낸 첫 세대

문화예술계가 4050세대의 기호에 맞추며 ‘주머니’ 공략에 나선 건 잠재적 문화인구인 10대를 대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이들을 발전 가능성이 있는 세대로 봤기 때문이다. 40~50대는 현재도 자녀들과 함께 가족 동반 관람을 이끌면서 자기계발이나 취미생활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연장을 찾는 문화 소비자다. ‘빈털터리 20대’ ‘직장생활이 바쁜 30대’에 견줘 경제력과 시간 면에서 여유롭기도 하다. 문화적 욕구가 높은 이들은 실버세대가 됐을 때도 공연 문화를 소비할 가능성이 높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다양한 문화적 세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탁현민 한양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한국에서 최초로 세대의 문화가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냈던 게 4050세대”라면서 “암울한 정치 상황을 이겨낸 민주화운동 세력이면서 서정적인 포크 문화를 주도했던 이들은 문화 전반에서 창작과 생산, 소비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문화 공연을 관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자로도 뛰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노년이 된 윗세대들이 해방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문화 소비·향유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현재도 즐기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4050세대가 문화를 향수하는 특징은 ‘배우면서 즐긴다’는 것이다. 예술의전당, 충무아트홀 등이 진행하는 클래식, 오페라, 성악 등의 교양 강좌 수강생 대부분은 장년층이다. 50대 중반의 싱글인 박경혜씨는 음악을 좋아해 기타 강습반을 다녔다. 거기서 만난 동년배 여성들과 함께 ‘미스티 밴드’(Misty Band)를 결성했다. 악기 파트를 나누면서 드럼을 새로 배우기도 했다. 강산에, 윤도현 등의 가수를 좋아했던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아마추어 밴드의 드러머가 됐다.

중·장년 여성을 겨냥한 아침 공연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관람료 1만~2만원이면 해설이 있는 수준 높은 공연과 함께 브런치도 즐길 수 있어 문화적 만족도가 높다(표 참조). 서울 예술의전당은 2004년부터 오전에 ‘11시 콘서트’를 열고 있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층은 40대 이상 주부들이 대부분이다. 공연 첫 달 이후로 현재까지 매회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공연부 정동혁 부장은 “클래식 음악이 지루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려고 해설과 동영상 등을 곁들인 덕분에 반응이 좋다”면서 “주부들 스스로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다는 프라이드까지 덤으로 얻어간다”고 말했다.

중·장년 여성들을 위한 오전 공연(※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중·장년 여성들을 위한 오전 공연(※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국립발레단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을 진행 중이다. 등 작품의 주요 장면을 보여주고 설명을 곁들인다. 주부 장영숙(60)씨는 “사랑을 표현하는 발레 동작 등을 배우며 무용 공연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지울 수 있었다”며 “다음에는 완성된 한 편의 무용극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국립극장에서 마련한 ‘정오의 음악회’는 부부 모임이나 친목 단체들의 참여가 높다. 국립극장 홍보팀 오지원 대리는 “4050세대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음악들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들려주면서 국악과 국악기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낮 텅 빈 공연장 채우는 40대 이상 주부들

평일 오후와 주말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낮에는 텅 비는 공연장과 극장을 채우는 데도 중·장년층 관객은 매력적이다. 여러 예술 공연장이 오전 11시 콘서트와 연극 등의 공연을 마련한 것도 공간 활용도를 높이려는 고심 끝에 나온 것이다.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도 주말이나 성수기와 상관없이 낮 시간 객석 점유율이 25%에 그치는 상황을 타개하려고 묘책을 짰다. 이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건 중·장년 여성들이라고 보고 이들을 유입하기 위한 멤버십 제도인 ‘미즈 스토리’를 운영 중이다. 40대 이상 주부 고객만 가입할 수 있는 이 회원권은 영화 관람 동반 1인권, 매점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상품권 등을 제공한다. 2년 전부터는 매달 서울 압구정점과 목동점에서 ‘브런치 클래스’도 운영 중이다. 주부들의 관심이 높은 영화를 브런치를 즐기며 관람한 뒤 영화·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행사다. CGV 홍보팀 이상규 팀장은 “대한극장에서 줄을 서서 영화를 보던 추억을 간직한 이들은 젊은 층의 문화에도 거부감이 없어 두터운 소비층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는 예상치 못한 중·장년층의 호응에 힘입어 앙코르 공연중이다. 사진 극단 ‘유’ 제공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는 예상치 못한 중·장년층의 호응에 힘입어 앙코르 공연중이다. 사진 극단 ‘유’ 제공

4050세대를 위한 문화 공연은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6월5일 개관하는 서울 명동예술극장은 옛 명동국립극장을 3년 만에 복원해 다시 ‘명동 시대’를 연다. 개관 기념 공연작은 영화 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다. 1960~70년대 연극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신구, 장민호 등 옛 명동국립극장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무대에 선다. 이후에도 작가 최인훈의 , 셰익스피어 고전인 등이 공연될 예정이다. 명동예술극장 공연팀 이미란씨는 “명동이 쇼핑 상권으로 바뀌면서 젊은이들 일색이었는데, 극장이 생기면서 문화에서 소회됐던 장년층들도 이 지역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좀더 창의적 작품들 나와야 흐름 지속될 것

4050세대가 선택하는 공연은 대체로 뮤지컬 등 해외 유명 작품이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공연물들이다. 최근 80년대 영화를 뮤지컬로 옮긴 , 연극 , 화가 이중섭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등 지나간 시대의 풍경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들이 많다. 뮤지컬 의 연출자 김재성씨는 “악극을 보기엔 젊고, 가벼운 로맨틱 공연물을 보기엔 나이가 있는 4050세대는 해외 유명 작품이나 드라마성이 강하고 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다”면서도 “시장을 세분화해 다양한 연령층을 공략할 수 있는 작품이 늘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4050세대를 겨냥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오는 콘텐츠와 마케팅이 일차원적인 접근이라는 비판도 있다. 탁현민 교수는 “지금의 40~50대는 새로운 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세대로 현재도 딸 같은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면서 “일차원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이들의 정서를 담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창작물들을 내놓아야 이들의 주머니를 더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050세대 일컫는 신조어들
루비족·나우족·노무족…


현재의 4050세대는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다양한 문화적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이전 세대들과 달리 자녀들의 성공에만 목을 매지 않는다. 자기실현과 노후 대비에도 관심이 크다. 여가생활을 보내는 데도 적극적이다. 젊게 살려는 욕구가 강해 정보통신 기기, 패션 등에도 관심이 높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정된 경제력과 정제된 라이프스타일을 갖춘 4050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열성적인 중년 여성을 일컫는 ‘루비족’은 상쾌함(refresh)과 특별함(uncommon), 아름다움(beauty)과 젊음(young)에서 영어 앞글자를 따 만들어졌다. 경제력 있는 중년 여성들을 일컫는 ‘나우족’(New Older Women), 더 이상 아저씨로 불리기 원치 않는 ‘노무족’(No More Uncle) 등은 이들이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패션, 전자, 유통업체 등도 이들을 공략하는 상품을 출시하며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돈을 쥔 이들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건 카드사다. 연령 특화 상품으로 ‘2030카드’를 만들었던 신한카드는 지난해 ‘4050카드’도 만들었다. 출시 1년 만에 가입자 수는 29만6천 명.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학원, 약국, 가족보험 등의 서비스와 와인, 골프, 문화공연 등 각종 할인 혜택을 넣었다. 신한카드 홍보팀 김성원 차장은 “사회와 가정에서 4050세대들이 주요 소비 계층으로 부상하면서 앞으로 비중이 계속 늘 것으로 보고 상품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 계층을 겨냥해 ‘오리진폰’과 ‘와인폰’을 출시해 경쟁 중이다. 백화점들도 매장 리뉴얼을 통해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와 신규 브랜드들을 선보이고 있다. 제일모직의 ‘르베이지’, 형지어패럴의 ‘크로커다일 레이디’ 등은 마담 부티크 상품들을 밀어내며 매출 신장세를 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시니어 산업 규모가 2005년 약 25조원에서 2010년에는 약 37조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국내 65살 이상 인구가 2010년에는 전체 인구의 14%(56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잠재력을 가진 4050세대가 실버 세대 편입을 앞두고 귀하신 몸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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