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4월 보름날 아침 흥부와 제비다리의 설화를 간직한 전북 남원시 성리마을에서 백두대간의 품에 안겼다.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았으나 문을 연 곳이 없었다. 허름한 밥집의 문을 두드리니 아침 준비에 한창이다. 요기를 청하자 라면에 찬밥을 차렸다. 내친김에 점심거리도 부탁했다. 보기에 딱했던지 급히 주먹밥 네 덩이를 만들어주며 마을의 특산품까지 선사했다. 꾸지뽕나무, 참빗나무(화살나무), 칡뿌리 등을 섞어 한몫에 달여낸 약수였다. 민간요법으로 보자면 꾸지뽕나무는 당뇨와 혈압에 좋고 참빗나무는 항암 기능이 있으며 칡은 위장을 달래주는 보양식품이다. 필자가 “이 물만 드시면 장수하시겠습니다”라고 덕담을 건네자, 부엌의 할머니는 “술 많이 먹으면 다 소용없어”라며 손사래를 친다. 물 정도야 얼마든지 마다 않는 게 산꾼들의 넉살인지라 감사히 받아먹고 복성이재 산모퉁이로 붙었다.
대간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은 산나물 캐러 나온 아주머니들이었다. 무엇을 뜯으러 왔냐고 물으니 두릅과 고사리라고 했다. 이 정도야 산골 인심으로 너끈히 받아줄 만하지만 대간 곳곳에 홀씨가 두루 퍼진 송이와 장뇌삼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젠 산골에서도 보기에 딱한 싸움이 곧잘 벌어진다. 대개는 필요한 만큼만 거두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 한 데서 빚어진 다툼이다.
복성이재에서 봉화산까지는 철쭉의 향연이다. 오랜 세월 지리산 자락에서 철쭉이라 하면 바래봉이 으뜸이었으나 봉화산 철쭉 또한 바래봉에 뒤지지 않는다. 바래봉이 화려하다면 봉화산은 그윽하다. 멀리서는 매혹적인 빛깔로 유혹하고 다가서면 몽롱한 향기로 발길을 붙잡는다. 어른 키보다도 큰 철쭉의 터널에 빠져들어 걷다 보면 어느새 봉화산 중턱이다. 눈이 부시도록 뜨거운 5월의 태양 아래 철쭉들은 피고 지고 또 피어난다.
몽롱한 향기의 봉화산 철쭉에 취해봉화산에서 광대치를 지나 중재까지는 편안한 오솔길이다. 산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철쭉의 잔향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내달리던 필자는 중재에 이르러 숨이 멎었다. 대간꾼들이 넉넉히 물을 보충하던 중재의 계곡이 말라버린 탓이다. 어디 중재뿐이던가. 산기슭 우물터 중 숨을 보존한 샘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창하게 지구 온난화를 말할 사안이 아니다. 사람이 가는 곳마다 물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중재부터 백운산까지는 대간꾼이 아니면 좀처럼 드나들지 않는 산줄기로, 긴 된비알이다. 등산로 곳곳에 ‘생태계 복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늘어서 있고 우회하는 길이 새로 생겼다. 덕유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백운산의 지명은 말 그대로 흰 구름에서 유래했는데, 정상에 서면 동서남북의 산세를 조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호사다마라던가. 백운산에 이르면 비로소 백두대간 곳곳을 후비고 잘라낸 상처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자락마다 돌과 흙을 퍼나르는 차량의 행렬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제 살을 깎아 보신을 취하는 것이요,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백운산에서 영취산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능선이다. 해질 무렵 이 길을 걷다 보면 시시각각 새로운 그림을 펼쳐 보이는 서편 노을에 제대로 취할 수 있다. 적색이 황색으로, 황색이 갈색으로, 갈색이 흙색으로 뒤바뀌는 조화를 감상하다 보면, 지리산을 떠난 백두대간이 처음으로 가지를 치는 영취산에 이른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장쾌하게 뻗은 능선이 금남호남정맥으로 낙동강·금강·섬진강의 분수령이다.
영취산이란 이름은 산세가 신령스럽고 빼어나다는 뜻으로, 인도의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의 산에서 따온 것이다. 불가에서는 석가여래가 이곳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취산 아래는 옛길과 신도로가 공존하는 무령고개로, 대간꾼들이 하룻밤 쉬어가는 곳이다.
영취산 서쪽은 전북 장수군이고 동쪽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이다. 두 지명을 하나로 이어주는 역사적 인물이 바로 백두대간에서 나고 묻힌 논개다. 장수에서 태어난 논개는 남편인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에 머물다 임진왜란을 맞았다. 진주성이 함락된 뒤 최경회는 진주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논개는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촉석루에서 몸을 던졌다는 게 민초들이 구전해온 역사다.
그러나 현재 논개의 무덤은 진주도 장수도 아닌 함양군 서상면에 있다. 학계에서는 논개의 문중에서 왜군의 추격을 두려워했거나 논개의 신분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논개의 묘가 발견된 것도 그가 순절한 지 382년 만인 1975년의 일이다. 저간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논개의 생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영남지방의 향토 사학자 중에는 논개의 삶이 역사적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일축하는 사람까지 있다.
진실이 어떻든 전북 장수군은 논개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영취산 아래 ‘의암 주논개 생가지’를 조성하고 관광객 유치에 열심이지만 앞뒤 궁합은 영 어색하다. ‘의암’은 논개가 몸을 던진 진주 촉석루의 바위를 뜻하고, 논개의 성이 주씨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게 다가온다. 또한 기록을 따르자면 현재 조성된 테마파크는 논개의 조부가 서당을 운영하던 곳이고, 논개의 실제 생가는 그 아래쪽 대곡저수지 근방이다. 지금 논개 생가와 무덤 입구엔 관광버스 수십 대가 주차할 만큼의 넓은 공터가 만들어져 있다. 논개의 궤적을 엿보기 힘든 그곳에서 사람들은 논개를 부르고 찾는다.
대간을 종주하다 보면 늘 잠자리가 문제다. 무령고개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한사코 고향마을에 들어선 최신식 모텔이나 숯불가마에서 쉬어가라 권했다. 산 타러 집 나온 사람에게 모텔과 숯불가마가 웬 말인가. 택시기사는 이제껏 쉬어간 이들이 모두 만족스러워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필자는 기어이 그의 고집을 꺾고 육십령 휴게소까지 내달렸다. 대간꾼들이 잊지 않고 찾는 조정자(70)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벌써 20년째 그는 육십령 고개를 지키고 있다. 그사이 육십령에도 예사롭지 않은 개발의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늦은 밤까지 잔소리를 보태는 할머니의 마음과 정갈한 음식 솜씨는 여전했다.
영취산에서 덕운봉을 지나 민령까지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내칠 수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이곳은 산죽과 억새가 등산로를 뒤덮었다. 그러나 지금은 등산로 곳곳에 산죽과 억새를 잘라내고 나무 계단을 만들었다. 길은 훨씬 부드러워졌으나 운치는 분명 예전만 못하다.
민령 못 미친 곳에 전북 장계면 방면을 시원하게 굽어볼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시간에 쫓긴 이들은 이 구간 최고의 명당을 놓치기 쉽다. 하여 덕운봉을 내려서면 천천히 왼편을 응시하며 걸어야만 시야가 툭 터지는 전망터에 머물 수 있다.
바쁘게 걸으면 놓치기 쉬운 명당 ‘너럭바위’민령에서 깃대봉까지의 구간은 완만한 비탈이다. 숨이 찰 만하면 능선 길이 열려 적절히 호흡을 조절하며 오를 수 있다. 깃대봉은 덕유산 남쪽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두 나라 영토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번갈아 기를 꽂았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깃대봉 동쪽 물은 추상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서쪽 물은 장계천을 따라 금강으로 향한다.
2006년 깃대봉이란 지명은 구시봉으로 바뀌었다. 어떤 풍수가가 이곳에 올라 산세를 짚어보니 구시형이라서 그리 변경했다는 게 비석에 새겨진 설명이다. 구시가 말구유를 뜻한다면, 아마도 이 지명은 깃대봉과 그 아래쪽의 제2 깃대봉을 잇는 안부를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깃대봉을 꼭짓점으로 육십령까지는 긴 내리막이다. 나무 사이를 지날 때마다 오밀조밀한 거미줄이 얼굴에 겹겹이 들러붙었다. 거미가 집을 지으면 비가 찾아온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리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릴 비는 대간의 마른 땅을 적셔주고, 길손들이 애타게 찾는 옹달샘을 채워줄 것이다.
육십령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육십령 고개엔 예부터 도적이 많아 어른 60명이 모여야 겨우 넘었다는 전설, 동쪽의 경상도 안의와 서쪽의 전라도 장수 관아에서 똑같이 60리를 걸어야 이곳에 이른다는 과학적 실측, 그리고 고개가 너무 많아 느릿느릿 너슨(예순)하게 넘어다닌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화가 나란히 남아 있다. 여섯 해 만에 들른 육십령 휴게소의 조정자 할머니께 작별을 고했다. 정이 많은 할머니가 말했다. “또 6년 지나야 올 생각인가?”
남원·장수=글·사진 육성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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