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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살아남기 위해 한 일

등록 2009-03-31 11:31 수정 2020-05-03 04:25
고 장자연씨. 사진 연합 김연정

고 장자연씨. 사진 연합 김연정

전 직장을 그만둔 날, 아니 그만두기로 결심한 순간을 기억한다. 어느 방송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 딸을 둔 부장은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팀에서 가장 어린 여자애였던 나를 옆에 앉혀두고 시답잖은 농담을 늘어놓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첫 직장이었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처지였고 학교에서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담배 연기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더 심한 음담패설을 듣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해결책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담배 자판기 앞에서 손목을 잡아끄는 부장의 손을 내가 뿌리치고 그의 부름을 못 들은 척 등을 돌려 나가버린 것도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아무 대책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내가 유일하게 결심한 것은 절대 성희롱 따위 없는 회사에서 일하겠다는 거였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그런 회사를 찾기란 억대 연봉을 받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에게는 저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고 나에게는 그것이 부장의 손길이었다.

고 장자연씨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순간도 기억한다. 한국방송 의 촬영장에서였다. 극중에서 감초 악역인 ‘진선미 트리오’의 ‘써니’ 역을 맡은 그가 드라마에 처음 등장하는 날이었다. 발랄한 화장에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그가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F4에 열광하면서 나무 바닥을 울리며 달려갔다. 화려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TV로 그를 보았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이더라도 히트작의 출연 기회를 잡은 것은 어쨌건 그 바닥에서 로또 3등 정도의 행운을 거머쥔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초 그가 자살하면서 남긴 자필 문서는 이 나라에서 여자로, 여배우로 일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감독, 재계 인사, 유력 일간지 대표 등이 포함됐다고 전해져 ‘장자연 리스트’로 불리는 이 문서에서 그는 그동안 기획사의 강요로 인해 이들에게 술 접대와 성 상납을 해야 했음을 털어놓았다. 고백이라기보다는 피를 토하는 고발에 가까운 내용이다. 어쩌면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었는데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으로 자신을 죽이고 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절하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종류의 성폭력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라면 더욱 공감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스트’의 파장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진실이 밝혀지지 않거나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고 장자연, 나와 동갑이었던, 자신의 꿈을 향한 길 위에서 당한 폭력과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이 세상을 등지고 만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여기를 떠나서 갈 곳이 저승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하고 슬프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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