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서울 명동에 위치한 화장품 브랜드숍 ‘미샤’. 매장에 들어서니 점원이 일본어로 인사를 건넨다. 3평 남짓한 매장 안은 일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 제품이 진열된 선반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적힌 상품 설명서가 빽빽하게 붙어 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화장품을 고르는 관광객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였다. 매장에 들어설 때 손에 쥐어주는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뽐내는 직원들은 관광객에게 일일이 제품을 설명하고 추천해주느라 바빴다. 일본어로 말을 걸어온 한 직원은 “매장을 찾는 손님의 90%가 일본인이라 실수했다”며 찾는 상품을 물어보더니 이내 신제품인 한방 스킨케어 제품을 추천했다. “일본어로 얘기하다 우리말로 제품 설명을 하려니 혀가 꼬인다”며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다른 브랜드의 명동 화장품 매장을 둘러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밤 11시에 닫는 에뛰드하우스 명동 1호점에는 13명의 직원이 있다. 10명 이상이 일본어를 할 줄 알고, 나머지 직원은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하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매장이라 외국어가 가능한 직원들로 특별 채용했다. 박주희 매니저는 “본사에서 외국어 교육을 지원하지만 직원들이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스터디 모임도 갖고 있다”면서 “특정한 시간이나 요일 할 것 없이 매장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 정신없이 바쁘다”고 말했다. 명동에 위치한 화장품 매장을 찾은 한국인들이 매장 안 분위기에 당황해 그냥 나오는 상황도 벌어진다.
경기 불황에도 화장품 시장은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2005년부터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오다 2008년에는 전년 대비 10.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화장품 업계 1위인 아모레퍼시픽은 ‘2009년 화장품 시장 및 트렌드 전망’ 보고서를 통해 2009년 화장품 시장이 6%대의 성장세를 이어가며 7조원 규모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다. 백화점 일부의 ‘프레스티지’(명품) 시장과 브랜드숍을 중심으로 한 중저가 시장의 상품들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특히 국내 시장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해외 시장에 진출한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의 약진이 돋보일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같은 전망의 토대가 된 건 ‘쇼핑 특구’ 명동이다. 명동에는 ‘미샤’ ‘더페이스샵’ ‘에뛰드하우스’ ‘스킨푸드’ 등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점해 있다. 우리은행 명동지점과 밀리오레를 잇는 명동 중앙로 1가만 해도 브랜드별로 10여 개의 매장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명동에 자리한 화장품 매장들은 일본·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관광객으로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엔고 현상’으로 지난해 하반기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이 늘면서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이같은 흐름에 맞춰 일본 내 여성잡지나 미용 전문서적들이 앞다퉈 한국 화장품을 소개하고 나섰다. 미샤 홍보담당자 김선아씨는 “한 달 평균 10건 이상 일본 언론 매체의 취재 요청이 있을 만큼 한국 화장품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저렴하면서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살 수 있다는 게 한국 화장품에 대한 일본 쪽 평가다. 일본 나고야에서 온 가사 히로미는 “한국 화장품은 잘 모르지만 관심이 많아 관광하는 틈틈이 쇼핑 중”이라고 했다.
배용준 포스터 나오자마자 품절한류를 등에 업고 ‘코스메틱 한류’가 이어지고 있다. 더페이스샵은 권상우, 배용준 등 인기 한류 배우들을 앞세워 한류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권상우에 이어 지난해 9월부터 국내 광고모델을 배용준으로 바꾸고 국내 매장 앞에 배용준 전신 입간판을 세워 일본인 관광객을 사로잡았다. 더페이스샵 홍보팀 송혜경씨는 “배용준을 모델로 기용한 뒤 더페이스샵의 일본 총판과 일본 현지 매장에 문의가 늘었다”고 전했다. 국내 매장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준비한 배용준 포스터 4만 장은 배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품절되기도 했다. 더페이스샵 명동점 매니저는 “아시아 전체에 걸쳐 배용준의 인지도가 높아서인지 일본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도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동 매장 1·2호점은 연일 매출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더페이스샵 명동 매장은 전년 대비 약 2.7배 매출이 증가했고, 명동 매장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 수도 전년 동기 대비 약 2.5배 늘었다. 성유리가 모델인 스킨푸드 명동 매장도 2008년 12월 기준으로 전년 대비 80%, 전월 대비 30% 이상 매출이 상승했다. 일본 뷰티 저널리스트인 우에다 사치코는 “일본인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계기가 한류”라며 “한국 여배우들이 아름다운 피부를 유지하는 비결을 부러워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과 한국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화장품의 인지도를 높인 건 비단 한류뿐만이 아니다. 국내 시장 경쟁에서 한계를 느낀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의 적극적인 아시아 시장 개척도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각국에 맞는 유통 구조와 소비자의 특성을 파악한 맞춤 마케팅이 아시아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스킨푸드와 에뛰드하우스는 타이에서 왕실 가족들이 사용한 제품으로 현지에서 소개되며 이슈를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여장 남자인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 잇코(본명 도요타 가즈유키)가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 화장품을 칭찬하면서 주목받았다. 특히 잇코가 소개했던 ‘비비크림’(화장한 듯 깨끗하고 촉촉한 피부를 표현해주는 메이크업 제품)이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어느 브랜드 할 것 없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에뛰드하우스는 발 빠르게 잇코를 일본 내 자사 모델로 기용했다. 에뛰드하우스에서 만난 후지와라 아키고는 “한국 여행을 마치기 전 선물용으로 가져갈 화장품을 고르고 있다”며 “일본에서는 잇코 덕분에 한국 화장품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이타마에서 온 쓰노 미키에는 대학 졸업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비비크림을 써봤다”는 쓰노는 “한국에 미인이 많아서 한국 화장품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제품과 매장 분위기는 고급스러우면서 가격은 저가를 유지하던 한국 화장품 브랜드들은 관세와 나라별 물가를 고려해 이제는 아시아에서 중저가나 중고가 제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 여행 기념품으로도 제격”명동에 입점한 화장품 브랜드숍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색적인 풍경도 연출된다. 개점 행사 때나 등장했던 내레이터 모델들이 매일 ‘삐끼’처럼 매장 앞에서 손님을 불러모으고, 관광객과 사진도 찍는다. 차별화된 서비스로 고객 유치에 나서기도 한다. 미샤는 명동 매장에서 제품을 사면 일본 현지 미샤 매장에서 10%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쿠폰 증정 행사를 가졌다. 에뛰드하우스 명동점은 10만원 이상 제품을 사는 고객의 짐을 호텔까지 배달해주는 ‘벨보이 서비스’를 시행했다.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 달러·엔·위안화를 환전해주는 서비스도 명동 매장을 개설하면서부터 제공하고 있다.
한국산 저가 화장품이지만 아시아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보니 면세점 진출도 활발하다. 미샤, 에뛰드하우스, 더페이스샵, 스킨푸드 등은 서울 워커힐을 포함한 국내 면세점에 입점해 해외 명품 브랜드와 경쟁 중이다. 서울 동화면세점에 입점한 미샤와 에뛰드하우스는 번갈아가며 지난해 면세점 입점 브랜드 중 월 매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 뷰티 저널리스트 우에다 사치코는 “한류와 관계없이도 한국 미용 제품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며 “한국 화장품은 가격과 내용 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저가 화장품이 아시아의 중저가 화장품으로 탈바꿈해 미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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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한국 화장품에 관심을 가졌나.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 배우 김래원, 윤손하 등과 친해지면서 한국 화장품도 접하게 됐다. 그 뒤 2007년 일본 쇼 프로그램인 에서 한국 여성의 피부 비밀이라며 비비크림을 소개했다. 그 기회로 배우 윤손하와 서울 명동에 위치한 한국 화장품 매장을 찾아다니며 제품을 소개했는데, 직접 써보니 저렴하면서 제품 품질이 좋아 관심을 갖게 됐다.
- 일본 내에서 한국 화장품의 인지도는 어떤가.
방송에 소개한 뒤 한국 화장품 열풍이 불었다. 한국의 비비크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 한국에서 화장품을 사가는 일본 관광객들이 늘었다. 일본인들은 화장품 구매 때 어떤 점을 고려하나.
일본 여성들은 색조 화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화장을 통해 화사하고 예쁜 얼굴을 연출하고 싶어한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보다는 얼마큼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제품인지에 관심이 많다.
- 일본 내에서 한국 화장품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일본은 화장품 로컬 브랜드 비중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으며 보수적 소비 성향이 강하지만, 한국 화장품 전망은 매우 밝다. 한국 여성은 일본에서 미인의 이상형으로 손꼽힌다. 일본 여성들에게 ‘피부 본연의 아름다움, 즉 생얼’과 같은 자연스러운 화장 비법을 소개할 때 한국의 저렴하면서 품질 좋은 제품들이 도움을 준다. 저가격·고품질 정책의 한국 화장품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환영받을 것이다.
- 한류가 한국 화장품의 인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나 또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 배우들의 패션, 뷰티 등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화장품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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