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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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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줘

힘들다고 비명 지르면서도 위로받을 곳 못 찾는 현대인들…
여자 바텐더와 이야기 나누는 ‘토크바’ 늘어나기도
등록 2008-10-24 11:17 수정 2020-05-03 04:25

국민은행 FX트레이딩팀의 노상칠(40) 팀장은 얼마 전부터 넥타이를 풀었다. 와이셔츠에 겉옷만 입고 출퇴근한다. 금융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이미 폭등한 환율이 워낙 널뛰기를 하는 탓에 ‘은행쟁이’의 상징과도 같던 넥타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다. 그는 아침 7시30분에 출근해 밤 11~12까지 자리를 지킨다. 간혹 자리를 비우기도 하지만, 신경은 늘 환율에 가 있다. 예전엔 장이 끝나는 오후 3시를 기점으로 긴장이 풀리는 이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업무 시간 중에는 초 단위로 움직이는 미세한 환율 변동을 따라잡느라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줘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줘

“집에 오면 공장 얘기는 안 한다”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그를 지치게 한다.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리 없다. 위로라고? 한가한 얘기다. 팀원 7명과 함께 근무하는 그는 집이 다행히 회사 근처에 있다. 하지만 가정도 위로를 얻는 장소는 아니다. 노 팀장은 “집에 가면 공장 얘기는 안 한다”고 했다. 다른 외환 딜러와의 대화에서 얻는 정보들이 그나마 위로가 될까. “외환시장에 오래 있다 보니 네트워크가 생겨 그쪽 사람들 만나서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 정보 공유를 한다”는 그는 “그것도 결국 업무의 연속일 뿐”이라고 말했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경제 그래프가 바닥과 천장을 잇달아 찔러대는 날이 길어지고 있다. 시장의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은 죽을 맛이다. 그뿐 아니다. 잇단 연예인의 자살 소식에 이어 ‘만인의 연인’ 최진실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 일반인들의 우울한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경제가 악화하면서 환자가 줄었는데 최진실씨 사건 뒤 우울증 환자가 도로 늘어 예전과 비슷한 상황이 된 것 같다”는 게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병후씨의 설명이다. 먹고살기는 힘들고, 세상은 더욱 각박해져간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 “힘들어요!”라는 외마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바쁘다.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

현대증권 홍보팀에서 일하는 전동진씨를 위로하는 건 여자친구와 하는 인터넷 메신저다. 그는 주식에 직접 투자도 하고 펀드에도 가입했는데, 최근 30∼40%가량 잃었다. 아직 매도를 한 게 아니니 실현되지 않은 손해에 해당하지만 어쨌건 “속수무책”이다. 전씨는 “이런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는 뭐하고, 직장 동료들과 메신저를 하며 오르는 종목 추천도 해주면서 대화를 나눠요. 가장 편한 건 동갑내기 여자친구예요. 자책감 갖지 말라고 저를 위로해줘요”라고 말했다.

AIG보험에서 고객의 포트폴리오를 짜주는 오동연 마스터플래너는 100여 명에 이르는 고객을 위로하느라 스스로를 위로한 시간은 엄두도 못 낸다. 오씨는 불안에 떠는 고객의 전화가 오기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할 수 있는 얘기는 별로 많지 않다. 예전 지표 등을 동원해 “상황이 불확실하니 그냥 파는 것보다는 조금 더 갖고 있는 게 낫겠다”고 설득하는 정도다. 오씨 자신도 브릭스 등 5개 펀드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중이다. 오씨는 “제일 좋은 위로의 방법은 역시 술이에요. 주로 고객을 만나죠”라고 말했다.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위로는 뭘까? 전문가들은 원만한 관계에 있는 친한 이가 차분하게 당사자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을 최고의 위로로 꼽는다. 황미구 한림대 교수(심리학)는 “사회적 네트워킹이 잘되면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건강해진다”며 “사회적 지지 체계가 많은 사람은 위로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제때 격려받지 못하는 아이들

금융이나 산업계 종사자들에게 닥친 위기는 언젠가는 해소될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건 한시적일 수 있다. 반면, 우리 사회에는 항상 위로를 필요로 하는 집단이 있다. 대표적인 게 과다한 학습 노동에 시달리는 중고생이다. 가출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어이없이 내놓는 아이들의 경우, 대개 적절한 때 격려와 지지, 위로를 받지 못했다.

올해 초 서울청소년상담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린 우빈(중2·가명)이는 그나마 사태가 더 이상 악화하는 걸 막은 경우다. 초등학생 때부터 반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한 우빈이는 지속적으로 부모에게서 “공부 더 열심히 하라” “사내아이답게 씩씩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급우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해도 아빠는 “사내자식이 그런 것도 해결 못하냐”며 타박하기만 했다. 우빈이의 성적은 조금씩 떨어졌고, 집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공부하라”는 엄마의 다그침은 더욱 거세졌다. 부모의 손을 잡고 찾아온 우빈이에게 센터 쪽은 힘든 점을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한편, 섬세하고 따뜻한 우빈이 성격의 장점을 부각시켜줬다. 우빈이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고 자주 웃었다. 센터 쪽은 부모에게도 아이를 다그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아이의 힘든 점을 이해하고 위로할 것을 권고했다.

위로를 받고 싶지만, 위로해줄 사람은 찾기 힘든 세상. 급기야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돈으로 위로를 구매하기에 이른다.

서울 신림동에 있는 한 여성 전용 토크바. 대화를 통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돈으로 위로를 살 수 있는 시대는 축복인가 재앙인가?

서울 신림동에 있는 한 여성 전용 토크바. 대화를 통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돈으로 위로를 살 수 있는 시대는 축복인가 재앙인가?

“7시간 떠들고 가기도 해요”

지난 10월15일 밤 서울 신림9동 서울대 앞 고시촌의 한 골목길에 있는 ‘ㅈ토크바’. 성매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술을 팔면서 손님의 이런저런 넋두리를 들어주는 토크바는 ‘위로의 공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남자가 여성 바텐더와 대화하고 있다.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수려한 외모의 다른 여성 바텐더가 앞에 와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에게서 대화의 기술이 느껴진다. 상대방 말을 함부로 끊지 않고 끝까지 다 들은 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맞장구를 친다.

올해 20대 후반인 유나(가명)씨는 지방 국립대를 나왔다고 했다. 고시촌의 특성상 이곳의 손님은 대개 고시생 아니면 직장인이다. “고시생들이야 식당과 고시원, 독서실만 왔다갔다 하다 보니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바에 오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쏟아내요. 위로받고 싶은 거죠.” 고시생들은 고시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지긋지긋하니까. 그냥 일상적인 얘기들만 한다. 직장인들은 회사 상사에게 깨진 얘기, 집안 얘기를 주로 한다. 그렇게 앉아서 몇 시간이고 대화를 한 뒤 돌아간다. 단골은 한번 왔다 하면 네댓 시간씩 얘기를 하는데 어떨 때는 “7시간을 떠들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정말 떠들고 싶어서 온 사람은 맥주 한 병 시켜놓고 사소한 얘기를 대중 없이 자기 혼자 입에 날개가 붙은 듯이 다 하고는 그냥 가요. 어떨 때는 안쓰럽죠. 친구랑 풀면 좋을 텐데….” 심지어 3시간 동안 자신에게는 한 번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손님 혼자 얘기하는 바람에 화장실도 못 가고 참아야 했던 쓰린 기억이 있다며 유나씨는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오픈 못하다가 여기 와서는 얘기가 길어져 자기가 막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고는 주제도 없이 떠들었다고 머쓱해하죠. 막연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일 수도 있고요. (얘기를) 받아준다는 느낌이 있으니까, 그에게는 그게 위로가 되니까….”

그렇게 외롭거나 괴로운 이들을 위로하다 보면, ‘심각한 위로’를 제안하는 이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유나씨가 예전 업소에서 일할 때는 40대 중반의 한 기러기 아빠가 자신과 딴살림을 차릴 것을 진지하게 제안한 적도 있다. 나름 돈도 있고 인간성도 썩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유나씨는 거절했다고 한다. ‘심각한 위로’로 한 가정이 파탄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간이 새벽 1시를 넘어서자 연이어 ‘외로운 나그네’가 1명씩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들에게는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이처럼 대화를 통한 위로를 해주는 ‘토크바’ 혹은 ‘모던바’가 늘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녹두거리 일대에 40여 군데이던 이런 업소가 최근엔 50곳 이상이라고 유나씨가 설명했다. 요즘엔 강남을 중심으로 여성을 고객으로 하는 토크바와 모던바도 늘어나는 추세다. 술 마시고 대화하는 애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2차’를 통한 성매매가 이뤄지기도 해 최근엔 유사 성매매 업소로 지목되기도 한다.

힘들어하는 이에게 귀를 열라

들판에도 마음에도 찬바람이 부는 때다. 살림은 어렵고 경제는 휘청댄다. 너도나도 위로가 필요하지만 위로해줄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위로가 필요 없다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안아주는 ‘프리 허그’가 보는 이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힘들어하는 이에게 귀를 30분만 차분히 열면 그를 위로해줄 수 있다. 어깨에 따뜻한 손을 얹거나,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여주는 것도 조그마한 위로가 된다.



위로 잘하는 법

1.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형성한다.
2. 상대방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끝까지 들어준다.
3. 눈높이를 맞춰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를 파악한다.
4.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
5. 함부로 충고하려 하지 않는다.

*도움주신 분들: 김병후 정신과 전문의, 황미구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박애선 서울청소년상담지원센터 소장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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