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개인을 확립하지 못한 왜곡된 근대화를 지적하는 </font>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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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혹은 근대성)에 도달했는가. 이 질문은 답이 너무 뻔해 보이기 때문에 다르게 반복되어야 한다. 일본에서 ‘개인’은 무엇인가. 도쿄 후지산 기슭에는 ‘관리자 양성학교’라는 곳이 있다. 기업들이 사원의 실적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원들을 보낸다. 실패한 ‘사무라이’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9시 반에 일정을 마친다. 훈련생들은 이곳을 ‘지옥훈련소’라고 부른다. 1993년 일본 여성 오히와 사쓰키는 특이한 사업을 성공시켰다. ‘일본 효과성본부-재팬 석세스 프레지던트’라는 비범한 이름의 회사는 남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샐러리맨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가족 임대’ 사업을 했다. 노인 부부가 젊은 부부와 손자를 제공받거나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조부모를 임대한다. 한 달에 두세 번, 다섯 시간에 12만엔.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을 반복해보자.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근대를 쟁취했는가, 일본에서 개인은 무엇인가.
껍데기만을 모방하기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2만6천원)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일한 미국 언론인의 책이다. 일본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단한 논지로 일본 사회를 중심까지 꿰뚫어버리는, 힘이 넘치는 탐구서다. 한 가지 의문. 일본은 늘 타자에 의해서만 제대로 조명되는 운명일까.
기업과 국가가 확장된 가족의 역할을 하고, 이웃나라에 쓰라린 원한의 감정을 품게 만들며, 자민당의 부패한 정치인들이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일본. 문제는 무엇일까? 지은이는 ‘국민성’에 대한 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일본의 국민성이 아니라 왜곡된 근대화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단정한다.
근대화와 동시에 군국주의로 달려가던 일본에도 패전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당과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이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미국은 계기를 빼앗아버린다. 이것이 ‘역코스’라고 부르는 정책 변화다. 덴노(천황)는 죽지 않았다. 미국은 냉전시대의 성배인 안정과 경제 발전에 우선 가치를 두었다. 국가주의자의 제거가 중단되고 전쟁 물자를 공급했던 재벌 세력은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 엘리트 세력들이 다시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역사·전통·이미지의 재구축이 일어난다. 국민을 억누르던 봉건적 관습이 전통이 되었고, 이 전통은 전쟁에 반대하는 ‘선량한 덴노’로 구현된다. 일본은 한순간에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나 열심히 일하고 말 잘 듣는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일본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미국에 빼앗긴 것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새롭게 창조된 환상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스스로를 지워가는 개인이 일본의 전통이었을까? 고대 일본은 가부장제와 거리가 먼 모계사회에 가까웠다. 7세기 쇼토쿠 태자가 유교를 수입해 일본에 규율과 위계적 신분질서를 정착시켰다. 12세기 말부터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사무라이 정권이 700년이나 이어졌다. ‘할복’이 보여주듯, 무사는 개인이 은밀한 사적 영역으로 완전히 퇴각하는 현상을 처음 경험한 일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무라이 전통과 일본 정신이 애창되면서 일본 역사는 부분적으로 삭제된다. 봉건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농민봉기는 전통에서 탈락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성을 스스로 만들어갈 계기를 맞이한다. 에도시대가 끝나가던 마지막 몇 달간은 새로운 기대로 가득했다.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축제가 이어졌다. 그러나 해방의 순간은 가고, 일본인들은 천황과 절대주의의 부활로 배신당한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비롯해 서구의 모든 것을 모방하지만, 그 ‘자기식의 변형’은 껍데기만을 발전시키고 속을 텅 비우는 것이다.
일본은 시민윤리가 들어설 자리에 기업적 가치관을 세워놓았다. 서류가방을 든 사무라이, 기업전사로 불리는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생산체제부터 자율성은 부정된다. 재벌이 하청업체를 착취하는 구조가 완성된다. 노동자가 기업이라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규정되는 체제 때문에 과로사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근대화는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신했고, 성장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됐다.
도시와 지방 사이의 구조에서도 자율성이 붕괴된다. 전후 모든 것이 중앙집권화하면서 근대 일본은 지역 정체성을 없애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1972년에 정계의 실력자이자 킹메이커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직에 오르기 직전에 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다. 토건국가는 일본 전후 체제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공공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중앙정부에서 시작된다. 수주 가격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게 분명한데도 유권자는 이런 사업을 환영한다. 건설회사는 선거운동에 거금을 기부하고, 정치가들은 건설회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진단 아래 지은이는 일본의 미래를 위한 독특한 제안을 한다. 현재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극우 국가주의가 아니라 ‘방기’다. 일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손을 놓아버렸으며 국제 문제는 미국에 의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들은 천황이든 역사든 전후 헌법이든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묶어놓는다. 나카소네 전 총리 같은 극우만이 뒤틀린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빈자리를 이젠 일본의 신세대 국가주의자들이 채우고 있다. 지은이는 일본이 정체성까지 미국에 맡겨놓는 의존의 고리를 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헌 논의는 큰 계기가 될 수 있다. 헌법을 유지하든, 일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든, 재무장을 하든 안하든, 전 국민이 열린 토론을 거쳐 어떤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격론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좋다. 스스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미래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우의 생각을 아예 활짝 터놓고 전국적인 논의에 불을 붙이면 헝겊을 벗겨낸 미라처럼 분해돼버릴 것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의문
지은이의 이런 논지는 때때로 한국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지은이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서구의 근대화를 이상화하는 진화론적 관점에 서서 일본의 근대를 비판하며, 일본 사회에 ‘미성숙’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일본 특유의 경제발전 양식과 보호무역주의에도 이런 딱지를 붙이는 것은 때론 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제안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한다. 지은이는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이나 국가주의의 재등장 등 몇 개의 빈약한 근거를 들어 지금 일본이 거대한 변화의 시점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일본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겪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만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개헌 논의 등을 통해 미국에 대한 의존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의 관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몇 개의 의문에도, 지은이가 견지하고 있는 논지의 핵심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 일본은 지금 격론을 벌이며 자신을 성찰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일본은 거울처럼 한국의 모습을 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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