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비가 오면 생각나는…

등록 2008-07-01 00:00 수정 2020-05-03 04:25

장마대세
그래, 그때도 비가 내렸다. 실제에서도 “이별 장면에선 비가 오”더니 어느새 그는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되어버렸다. 쓰린 가슴과 우울한 기분을 달래려고 비만 오면 파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들이켰고,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책과 만화, 노래와 영화를 찾아헤맸다.
또 비가 줄창 내리는 장마철이다. ‘장마대세’(장마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그 마음으로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음식, 음악, 패션, 기분, 여행, 생활의 지혜, 책, 만화, 영화 등을 짚어봤다.
하나, 두둥…. 기사를 준비하는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무개 선배는 장마는 장마전선이 기준이다, 장마철 내내 비가 오냐, ‘마른 장마’도 있다,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나저나 이 기사가 독자들에게 다다를 다음주 ‘장마철’도 맑은 날만 계속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그래도 우리는 “비가 오면 생각나는…”이라고 했지 “비가 올 것이다”라고 한 건 아니니까…, 흠….

습도 높은 책
우울증의 정점으로!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장마에 읽을 만한 습도를 가진 책은 윤흥길의 소설 다. 시종일관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끈적끈적한 공기처럼 불안과 공포가 주기적으로 침입해온다. 그리고 이 사태를 어린아이 혼자 감당해내고 있다. 소설 속의 비에 대해선 말 많은 이들이 주석을 참 많이도 붙여놓았는데, 우리가 가져야 할 관점은 하나다. 비는 그냥 비다. 한국전쟁의 상처를 되새기든 말든, 이 옛날 소설은 놀랄 만큼 재미있다.

여기에 스티븐 킹의 을 추가하면 장마철의 밤이 완성될 듯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건 비가 아니라 눈인데, 콜로라도 산속의 끔찍한 단절감과 적막을 느낄 수 있다. 그 ‘빌어먹을’ 눈보라 속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동서고금의 해묵은 범죄가 되풀이되고 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오징어를 씹으며 우울증의 정점으로 내려가보자. 아, 짜릿해라.

비 유형별 공략 만화
장맛비 도박이냐 토막비 식탁이냐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비의 유형별로 달라진다. 거침없이 비가 오는 날이라면 책을 읽는 사람 주위로 비의 장막이 쳐진다. 푹 빠질 수 있는 긴 만화가 좋겠다. ‘몰입’으로 치자면 후쿠모토 노부유키가 최고다. 처럼 가위바위보, 주사위, 파친코 등 세상 가장 단순한 게임을 가지고 온갖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도 좋고, 처럼 금융계 큰손 밑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도 좋고, 처럼 외로운 남자의 ‘인정 투쟁’도 좋다. (좀 극단적으로) 단순명쾌한 만화체는 몰입으로 가는 데 방해될지 모르는 요소들을 단칼에 베는 것 같다. 이렇게 힘든 여정을 겪어왔는데도 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현재 39권까지 발간).

비가 드문드문 내리면 가끔씩 눈을 들어 밖을 볼 수 있는 단편만화가 좋겠다. (시무라 시호토)은 여러 음식을 단서로 한 단편을 묶었다. 권마다 감정의 소모 없이 깔끔한 스토리가 10편가량 담겼다(달걀을 만지지도 못하던 동생이 일찍 결혼을 한 뒤 가장 잘 만들게 된 요리가 오믈렛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언니 편을 읽고는 만화에 나오는 대로 오믈렛을 만들어보았다. 신기하게도 ‘호텔식 오믈렛’이 만들어졌다). 현재 2권까지 나왔다.

‘마른 장마’가 대부분인 장마철이라면 이원복 교수의 를 틈틈이 보는 것이 좋겠다. 페이지별 노동량이 가장 높은 것 같은 밀도 높은 만화는 조금씩 냠냠 나눠가며 읽을 수 있다. ‘좋은 사람과 분위기 좋은 데서 마신 와인이 가장 맛있다’는 철학은 소박하지만 정보량은 엄청나다. 빗소리에 맞춰 읽다가 다음을 기약하고 잠들기도 좋다. 알딸딸하게.

비 영화 클래식
우산 아래 말간 얼굴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장마의 눅눅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면 손예진과 조승우가 주연한 영화 을 꺼내보자. 창밖의 빗줄기가 그대로 화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는 의미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풋풋했던 첫사랑의 가슴 설렘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의 뜨거움 그리고 이별의 아픔. 이 모든 감정의 변화들이 비를 타고 전해진다. 여자 주인공만큼 비를 예쁘게 활용한 작품이다.

첫사랑의 풋풋함을 더욱 느끼고 싶다면 영화 내내 시원하게 빗줄기가 쏟아지는 이와이 지 감독의 와 세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한 감독의 이 좋겠다. 화끈한 액션을 원한다면 ‘진흙탕 개싸움’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이명세 감독의 를 보라. 강동원과 조한선이 주연한 도 가볍게 즐기기 좋다. 우산을 걷으면 그 아래 강동원의 말간 얼굴이 나온다. 영화관 이곳저곳에서 탄성과 아우성이 터진 장면이다. 1952년 작품인 는 장마철 고전.

[한겨레 레드-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뽀송뽀송한 것을 애타게 찾아서

▶살인 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

▶비가 온다, 떠나자

▶방구석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 검박함

▶펜타포트 가면 장화를 신을 수 있대지

▶비를 먹는 건지 국수를 먹는 건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