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학자와 한국 소설가의 수상한 여행서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여행의 계절이다. 여행. 더운 바람이 우리 귀에 속살거리는 유혹. 가장 안전한 일탈. 야근에 지친 당신을 위해 신간 여행서 두 권을 소개한다. 그러나 미리 말하자면, 이 책들은 당신의 기대를 배반할 것이다. 당신이 경험한 모든 여행처럼.
(마이클 예이츠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 1만6천원)는 ‘어느 경제학자의 미 대륙 탐방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같은 ‘미 대륙 탐방기’라도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같은 몽롱한 에세이와는 다르다. 마이클 예이츠는 1969년 베트남전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피츠버그대학 존스타운 분교에서 경제학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가르친 지 10년 정도 지나자 그는 “노동이 정말 불쾌한 것”임을 알게 된다. 레이건 정부 시절부터 대학은 이윤을 지향하는 일종의 회사로 변해갔다. 더불어 학생들의 ‘반지성주의’도 고양되는데, 이 소설 제목인 줄 아는 학생들이 강의실을 메운다. 2001년 1월 비과세로 모든 연금을 찾을 수 있는 55살이 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냉큼 짐을 싼다.
불평등·노동·환경이라는 지층
지은이는 2001년 5월부터 2006년 9월까지(그리고 아마도 지금까지) 미국의 거의 전역을 횡단하고 종단한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뿌리 없는 삶 같은 것이어서, 지역마다 몇 달씩, 혹은 1년 가까이 머무른다. 거실 소파를 사고 버리고 또 사다가 지쳐서 가구가 완비된 아파트를 빌린다.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마이클 예이츠, 그 자신이다. 이 깐깐하고 완고한 좌파 늙은이는 쉴 새 없이 미국식 유머를 구사하면서 투덜대고 구시렁댄다.
미국은 아름답다. 지은이는 맨해튼의 화려함을 묘사하고, 포틀랜드의 온화한 기후와 유기농 먹을거리를 찬양한다. 애리조나 사막지대의 황홀함에 넋을 잃고 콜로라도의 장엄한 협곡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 책의 달콤함은 여기까지다. 지은이는 아름다움의 각질을 뚫고 들어가 불평등, 노동, 환경이라는 이름의 지층들을 탐사한다.
이 여행을 이해하기 위해선 지은이가 끊임없이 목격하는 풍경 하나를 펼쳐놓으면 된다. 한적한 교외부터 오지의 국립공원들까지 부자들이 몰려와 지대를 끌어올린다. 가난한 토박이와 노동자들은 갑자기 뛰어오른 집값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힌다. 부자들이 운영하는 개발업체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환경을 파괴한다. 앨런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이 일으킨 부동산 거품을 보라. 갈수록 부자들의 속도는 빨라진다.
노동은 어떤가. 지은이는 옐로스톤 국립공원 위탁관리업체 직원(호텔 프런트 데스크)으로 4개월 동안 일하며 ‘질 나쁜 일자리’의 위력을 느낀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런 일자리들은 고용주의 24시간 감시와 잔인한 노동강도를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 겨우 두 블록을 이동한 구급차 이용료로 800달러를 청구하는 치명적인 의료제도가 더해진다. 여기에다 모든 환란의 밑바닥에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또 추가해야 한다.
노동과 환경의 악순환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는 농업이다.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던 아이오와의 전통 농업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에 패했다. 옥수수는 그 유명한 미국 소의 사료로 쓰이고 음료와 과자에 들어가는 과당으로 변신해 비만을 만든다. 옥수수밭에 뿌려진 엄청난 질소는 미시시피강으로 흘러들어가 멕시코만에 ‘죽음의 지대’를 형성한다. 책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의 기대 수명은 아직도 49살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멕시코에서 온 사람들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재배업자가 왕이다. 그들은 물을 독점하고 농장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폭력으로 막아왔다.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불평등, 노동, 환경을 관통한다.
“미국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험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 말은 이 여행의 결론이자 목적이다. 풍요의 한 귀퉁이만 돌면 마약중독, 총격전, 성매매의 골목이 나타나는 풍경.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못 보는, 혹은 못 본 체하는 현실 앞에서 그는 아직 자신만만하다. “나와 내 아내가 보았던 것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투쟁에 동참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여행은 문학과 같다
마이클 예이츠의 불평에 지친 채 (김연수 지음, 창비 펴냄, 1만2천원)에 들어서면 소설가의 매끄러운 문장에 편안해질 것이다. 김연수는 여행에 대한 에세이를 시간대를 뒤죽박죽 섞어가며 보여준다. 첫 부분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중국 국경을 넘을 때와 아버지가 태어난 일본으로 건너갔던 때를 회상한다. 왜 국경을 넘고 싶었을까? “(반도 남반부에 갇힌) 나는 국경이 없는 존재니까.” 이 문장은 책의 전체 내용을 암시한다. 는 결국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고집불통 늙은이 마이클 예이츠를 끌고 들어와보자. 예이츠의 의식 속에서도 국경은 없다. 이건 그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못한다. 미국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국경은 없다. 하지만 이건 고통이다. 우리를 가둬둔 바깥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김연수를 따라 독일 밤베르크, 미국 버클리, 중국 옌볜을 거쳐오는 동안 우리는 연방 낄낄거리게 된다. 특히 말끝마다 “일없습니다”를 외치지만 그때마다 일이 터지고 마는 훈춘 사람 이춘대씨, 위장결혼 브로커에서 숙박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신국판’과 ‘멸치’는 한민족의 유머감각을 느끼게 한다. 그는 여행의 에피소드들을 특유의 재치로 버무려놓았다. 하지만 정작 묵직한 본론은 뒤에 나온다. 2006년 2월 지은이는 김사량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중국 후자좡 마을로 간다. 그는 김사량이 왜 1945년에야 중국으로 망명했는지,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한다. 김사량은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됐던 작가다. 김연수의 답은 이렇다. “김사량은 국경을 넘어 알 수 없는 미래의 공간으로 탈출했다. 그 새로운 미래는 그가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언어로 구성됐다. 작가라면 이게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지 알 것이다.”
즉, 김연수의 여행은 문학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실은 여행으로 위장된 문학이다. 진정한 작가는 ‘내부’를 벗어나 경계를 넘으려 하는 존재다. 작가는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간다. 그러나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 또 다른 내부로 흡수되지 않는다. 우리와 타자의 구분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온몸으로 경계를 밀어올린다. 여행도 그러하다.
이제 이 수상한 여행서들을 읽을 준비가 되었다면 치러야 할 의식이 있다. 좀 청승스럽더라도 혼자 낯선 거리의 찻집에 들어가 녹차든 커피든 한 잔 시킨다. 책을 펴든다. 빗소리가 들리면 더 좋다. 고개를 들면 거리는 온통 물빛이다.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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