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수집품을 감상하고 레저문화 즐겨… 조선 후기 생활사 연구하는 한문학이 ‘고루한’ 이미지 벗고 인문학 주도하네
조선의 일상이 황금어장이다!
온 사방이 공부밭이다! 퀴퀴한 고전을 뒤지는 분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이 ‘웰빙’ ‘글로벌’ 학문의 첨병이자 국내 인문학 르네상스를 이끄는 끌차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엄청난 문헌자료에다 일상의 놀이와 여가, 동아시아란 관점을 들이대고 보니 곳곳이 ‘황금어장’이다. 어디를 파도 좋다. 사방팔방이 다 학문의 새로운 광맥이다. 공부할 거리들이 수두룩하다. 눈길 주는 곳마다 툴툴 털어내면 담론과 쟁점이 쏟아진다. 해외로 나가면, 우리와 비슷한 중국·일본, 전혀 다른 유럽과의 비교연구 과제가 기다린다. 21세기 한국학의 광맥을 캐는 그들 뒤에 환호하는 인문학 독자들과 출판사도 있다. 한문학자들은 지금 국내 학계에서 가장 바쁘고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고무된 분위기와 열정, 유행만이 전부일까.
▣ 교토(일본)=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8세기 한양 선비들이 ‘웰빙’을 따졌다고요? 웰빙이 뭐죠? 일본엔 없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유행한 용어인데, 풍족한 생활을 바탕으로 어떻게 잘살까, 잘 놀까 따위를 따지는 걸 말하죠.”
“선비들이 정원 짓고 꽃 키우고 취미생활 하는 데 웰빙이 왜 필요한 거죠?”
“지금 한국 사람 마인드와 딱 맞아요. 18세기 서울의 유한층 선비들도 삶이 풍족해지니 여가와 문화를 흠뻑 즐길 궁리에 빠졌죠. 그때도 삶의 질이 문제였던 겁니다.”
책 수집하고 애완동물 키우던 ‘벽’들
지난 4월18일 낮 일본의 명문대학인 교토대 교정 북쪽의 인문과학연구소 회의실. 18~19세기 한국과 일본의 도시문화를 주제로 20여 명의 한·일 한문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웰빙’ 토론이 벌어졌다. 이 대학 인문과학연구소와 한국 연구자 모임 ‘문헌과해석’이 공동 주최한 학술세미나 자리였다. ‘18세기 조선의 웰빙 풍조와 원예 취미’를 발제한 정민 한양대 교수에게 일본 쪽 연구자들의 질문이 거푸 이어졌다. 18세기 서울의 유한층 선비와 중인들의 꽃 키우기, 정원 조성 등을 도시 소비문화를 즐기는 웰빙 현상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수양 차원이 아니라 눈으로 즐기는 대상으로 보게 됐고, 골동품·책 수집, 앵무새 따위의 애완동물 키우기 등이 ‘벽’(癖)이란 신종 마니아를 낳으면서 유행했다는 설명이 여러 문헌들을 제시하면서 이어졌다. 이미 500여 년 전부터 정원과 꽃꽂이 따위를 생활습관으로 받아들였던 일본인들은 18세기 들불처럼 일어난 조선의 웰빙 붐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참석한 한국 학자들은 하나같이 18세기 서울의 유한층 양반이나 중인(경화세족)들이 즐겼던 건축, 주거, 취미 등의 웰빙 소비문화에 초점을 맞춘 논문을 내놓았다. 이종묵 서울대 교수는 경화세족들이 동대문 밖, 아차산, 양주 등 서울 근교에 거대한 별장이나 집을 짓고 자명종 등의 이색 수집품을 감상하면서 레저문화를 즐겼다고 당대 인테리어 주거문화상을 소개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18세기 요절 문인 유만주가 남긴 일기와 문집초본을 발굴했다. 당시 한양의 값비싼 명당 주택지에 대한 알뜰한 답사 품평기와 동대문 밖에 지으려 구상했던 대규모 정원 주택의 얼개, 숭고한 품격을 강조한 정원 설계의 미학적 기록 따위를 공개했다. 또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18세기 한성 여성들의 사치스런 덧머리(가채) 패션 열풍의 규제 여부를 놓고 영조·정조와 신하들이 조정에서 격론을 벌인 전말을 다루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 발제를 한 노영구 국방대 부교수는 조선 후기 수도방위를 위해 군인들이 모여들면서 서울 인구가 급증했고, ‘왈짜’로 불린 유랑군인들의 건달 같은 삶이 서울의 도시 소비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일본 오사카도 호위 무사들이 몰려들면서 생활용품을 조달해주는 상인층이 같이 성장해 서울처럼 인구가 늘고, 난만한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는 의견들이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나왔다.
△ 싸움질하고 노름하고 조선 후기 계층 사회의 일상을 단적으로 엿보게 하는 풍속화들. 최근 소장 한문학자들의 재조명이 활발한 영역이기도 하다. 사진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 단원 김홍도의 , 혜원 신윤복의 춘화 (이부탐춘), 겸재 정선의 , 한가운데 그림은 긍재 김득신의 .
소득 2만달러 시대에 어울리는 연구
발제 내용들은 엄청나게 널린 조선 후기 문집, 문헌류에서 새로 발굴한 생활사 기록들이 바탕이 됐다. 모두 기존 학계에서는 ‘연구 감이 안 된다’며 눈길조차 주지 않던 자질구레한 일상적 기록들이다. 18세기를 기점으로 경제력이 발달하면서 조선의 수도권에 명분 대신 일상의 삶 자체를 열심히 즐기는 도시인, 소비문화족의 콘셉트가 오늘날 레저문화처럼 자리잡았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논지였다. 이종묵 교수는 “소득 2만달러 시대의 학문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라고 했다. 반면 일본 연구자들은 정원과 원예에 대한 당대 서울 사람들의 열광에 놀라워하면서도 이런 도시문화가 왜 19세기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됐는지 의문을 던졌다. “그 의문을 푸는 게 우리 모임의 과제”라는 김문식 단국대 교수의 대답을 끝으로 종일 진행된 세미나는 끝났다.
열기 넘쳤던 교토대 세미나는 웰빙을 발판 삼아 글로벌 담론까지 치고 나오는 인문학계의 한문학 열풍을 반영한다. 생활사와 일상 연구로 대중과 접점을 맞춘 최근 한문학의 웰빙 탐구는 유행 수준을 넘어섰다. 글로벌 명제를 앞세워 조선 후기 생활사 분야로의 거침없는 진군이 계속된다. 한문학은 지식인 사회는 물론 인문학 독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유력한 담론의 샘이 되고 있다. 가장 고루한 학문 장르이자 국문학의 의붓자식으로 치부되던 한학 연구자들의 기세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미 조선 후기 생활사나 문화사 측면에서 역사학계나 사회학계, 미술사학계를 추월하며 새 담론을 주도적으로 내놓고 있고, 학제 간 연구도 앞장서 이끄는 상황이다. 소장 한문학자들은 실증에만 치중하는 기존 역사학자들보다 훨씬 유연한 시각으로 문헌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까닭이다.
급기야 최근 한문학계는 학계에서 금기 중 금기로 여기던 ‘섹스 담론’에 대한 분석까지 시도하기 시작했다. 6월21일 동국대에서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열리는 한국 한문학회 하계학술대회는 일종의 학문적 모험으로 비친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선비, 중인, 서민들 사이에 공공연히 유통되었던 춘화, 도색소설 등이 논의의 텍스트가 된다. 고전학계에서 성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인 학문적 토론이 이뤄지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인데, 남녀의 정사 장면이 실린 춘화나 같은 하드코어 도색소설의 장면 등이 텍스트로 거론된다는 사실도 큰 파격이다.
‘글로벌 한문학’ 시도도
밑그림도 간단치 않다. 저술을 통해 조선 후기의 저변 풍속사를 낱낱이 분석해온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단국대 윤채근 교수와 같이 ‘한문학과 성담론’을 발제하며, 학계에서 소문난 춘화 수집가인 진재교 성균관대 교수가 한·중·일 동아시아 춘화에 대한 연구 성과물들을 갈무리해 내놓을 계획이다. 김경미 이화여대 강사는 고전소설 속의 섹슈얼리티를 새롭게 탐구한다. 진재교 교수는 “당시 제도나 사회가 섹스를 이념적으로 용납 못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성담론은 일종의 금기를 깨뜨린다는 사회적 발언으로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며 “춘화의 유통은 지식 정보의 유통이란 측면에서도 학문적 접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획을 주도한 정민 한양대 교수도 “중국·유럽에서는 성담론 학술연구서 사진집이 당연한 담론의 대상이고 관련 저술도 엄청나게 쏟아지는데, 우리 쪽은 춘화나 남근석 사진의 자료집도 판금시키는 등 아예 논의의 조건 자체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중량급 학자들 위주로 성 담론화를 위한 논의의 물꼬를 터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문학회 쪽은 올해 10월 예정된 추계학술대회의 주제도 ‘한문학과 바다’라는 색다른 주제를 잡아놓았다.
웰빙 한문학 트렌드의 열풍은 방송에도 밀어닥치고 있다. 한국방송 1라디오에서는 아침 뉴스 프로그램이 끝나는 평일 7시54분부터 약 3분간 시사 문제를 동양고전에 접목시켜 해석하는 이라는 간이 프로그램을 지난 4월21일 신설했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와 박재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번갈아가면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심 교수는 21·22일치 방송분에서 의 문구나 19세기 지식인 최한기의 글을 인용하면서 낙하산 공직 임명, 조기교육 광풍 등의 세태를 비판하는 방송 칼럼을 내보내 호평을 받았다. 이 방송을 애청한다는 이종묵 교수는 “짧은 고전 문구를 통한 촌철살인의 교훈이 재미있었다”며 “한문학이 현대인의 삶과 일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방증이 아니겠느냐”고 풀었다.
풍성한 자료로 탈근대화 담론 이끌어
한문학계 새 트렌드의 한 축이 웰빙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이른바 글로벌 담론으로 대표되는 다른 나라·지역과의 비교연구다. 동아시아, 그리고 서양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문화사를 견주어 분석하는 것이 뼈대다. 거창하게 이름 붙인다면, ‘글로벌 한문학’이라고 할 만한 시도들도 최근 웰빙 트렌드 못지않게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 18세기 동서양 연구자 간 학제 모임인 18세기 학회는 출판사 김영사와 손잡고 국내 동서양 인문학자들의 ‘18세기 대담 시리즈’ 출간을 추진하고 있다. 우선 지난 연말 정민 교수와 서울대 불문과 이영목 교수가 ‘18세기 조선과 프랑스의 백과전서파’를 주제로 학회의 주제 발표와 대담을 마치고 첫 번째 대담집 간행을 앞두고 있다.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실학담론과 ‘제자+스승’의 집체적인 지식 경영을 당대 디드로와 볼테르가 주도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담론 구조와 비교한 작업이다. 2차 작업으로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이화여대 영문과 최주리 교수와 ‘18세기 도시문화, 한양과 런던’을 주제로 대담하는 자리를 추진 중이다. 서로 직접적 연관이 없으면서도 지식계의 동향이나 도시 집중, 과밀화 등에서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한국과 유럽의 18세기 문화사적 양상들을 흥미있게 재검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한문학이 대중과의 소통을 부르짖으며 생활사와 당대 대중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은 새삼스런 트렌드는 아니다. 이미 90년대 중·후반부터 30~40대 소장연구자들과 각종 연구모임들이 활발한 저술과 간행 활동 등을 펼쳐왔다.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서구와 한국 한문학의 넘나들기를 고민해온 연구집단 ‘수유+너머’, 벽이 없는 학제 간 연구자 모임으로 한문학 대중화의 진원지 구실을 해온 ‘문헌과해석’ 등이 그런 끌차 구실을 해온 연구 집단들이다. 그러나 최근 흐름은 대중적 접점을 넘어 인문학계, 특히 한국학계에서 본격적인 학문적 주도권을 잡고서, 담론의 주제를 설정하고 재생산을 주도해 이끄는 단계로까지 접어들었다. 이들이 발굴한 옛 일상의 단면들이 지금 삶과도 잘 맞물리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최근 출간되어 호평을 받은 소장 한문학자들의 대중적 저술들(사진/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사진 양쪽의 인물사진은 한문학 르네상스를 이끈 대표적인 소장학자들이다. 왼쪽 위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종묵 서울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강명관 부산대 교수, 정민 한양대 교수, 진재교 성균관대 교수
출판 동네에도 이런 맥락에서 당대의 일상과 삶의 미세한 구석을 살펴보는 소장 한문학자들의 역저가 쏟아지고 있다. 실학자 서유구의 고전 가운데 선비와 서민들의 주거문화에 관한 기록을 추린 (안대회 편역), (이종묵), (심경호), , (이상 정민), , (이상 강명관) 등의 저술이 그것이다. 특히 정 교수와 강명관 교수, 안대회 교수, 이종묵 교수 등은 이런 한문학 르네상스를 이끄는 주역으로 평가된다. 안 교수는 “전에는 한문학이 역사학계 쪽 경향을 뒤따라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풍성한 자료 덕분에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탈근대 담론까지 이끌어내고 있다”고 평한다. 조선 후기 풍속사에 대한 선구적 흐름을 이끈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경우 만연한 민족주의 근대 담론을 배제하고 중국의 지식담론과 양반 체제에 기댔던 18세기 도시 지식인 문화의 객관적 현실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앞으로도 해석의 기본기와 독특한 관점만 갖춘다면, 엄청난 분량의 한문학 자료들은 얼마든지 흥미롭게 재조명이 가능할 정도로 학문의 ‘블루오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세기 학문의 주담론이 실학이었는데, 생활사·일상사 쪽에 대한 한문학계의 집중조명으로 실학이 오히려 퇴색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들도 퇴폐적 소비유흥으로 빠지지 않았나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한문학계의 혁신 바람이 마냥 온당한 것으로만 인정받고 있는 건 아니다. 이미 학계 일각에서는 한문학 르네상스가 관점의 진정성을 벗어나 흥미나 선정성 위주의 소재주의로 흘러갈 수 있다거나, 재조명된 콘텐츠가 문제 의식을 배제하려는 자본의 이윤 콘텐츠 전략에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는 경계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문학 연구에서 핍진한 문제의식을 강조해온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지적은 적실한 일침처럼 비친다.
“일상과 생활을 중시하는 한문학의 새 흐름은 엄숙한 근대 민족 중심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그러나 고전 인문학을 이윤 콘텐츠화하려는 출판이나 언론 자본의 요구에 순응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근대와 민족에 짓눌렸던 인간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내겠다는 비판적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흔히 거론하는 18세기 소비문화의 주도자인 선비, 중인들도 결국 양반 체제와 중국 문화 흐름에만 기생하다가 19세기 퇴폐적인 소비유흥의 길로 빠지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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