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출판] 진화론, 인간에 대한 명예훼손

등록 2008-04-25 00:00 수정 2020-05-03 04:25

다윈에 반대하고 인본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의 고백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유기체의 모든 개체군에서는 언제나 변이가 존재했다. 이들 중 몇몇은 유전되고 그것의 소유자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먹이 공급에 대한 압력이 존재한다. 이것이 생존을 위한 동종 간의 지속적인 경쟁을 낳는다. 이 경쟁에서 경쟁자에 비해 유전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는 유기체들이 자연적으로 선택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선호되는 변이가 새로운 종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아시다시피다. 찰스 다윈이 에서 설파한 ‘진화론’의 정수다. 신심 깊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얘기지만, 바야흐로 21세기다. 종교인들 중에도 성서 창세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철학자 데이비드 스토브가 쓴 (신재일 옮김·영림카디널 펴냄)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저자가 1994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야 탈고했다는 이 책은 ‘과학’이란 외피를 두른 진화론, 그 ‘당연함’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 11편을 묶은 사색의 기록이다. 스토브는 책 첫 문장부터 의도적인 ‘도발’을 감행한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책이다. 내 목표는 다윈주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뒤늦게 ‘계몽의 시대’를 살아내느라 허덕이고 있다. ‘털 없는 유인원’이란 조소와 ‘이기적 유전자’라는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다윈주의자’를 자처한다. 는 이런 ‘지적 무기력’을 겨냥한 ‘우상 파괴’ 시도다. 창조론자의 억지가 아니냐고? ‘신앙고백’이라도 하듯 그는 서둘러 이렇게 썼다.

“나는 창조론자가 아니며, 기독교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해야겠다. 사실 내게는 종교가 없다. 내가 속한 종이 육지 포유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종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사실 역시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스토브는 자연선택이 ‘과거의 종에서 새로운 종이 생겨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다윈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선택이 ‘현재’ 인간에게서 ‘진행 중’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자연선택이 과거의 인간에게서 일어났었다는 것도 부인한다.

그가 내세운 ‘비판의 무기’는 딱히 특별할 게 없다. 진화론이 옳다면 모든 종이 생존을 위해 무자비한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데, 이타적인 행동을 곧잘 하는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게 “너무나도 명백하다”는 게다. 무엇보다 스토브는 인간을 “토끼나 파리, 대구나 소나무”처럼 취급하는 것에 분노한다.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수단”이라는 식의 주장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우스꽝스런 명예훼손’일 뿐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계몽주의의 독창적이고 전형적인 생각”이었던 초기 진화론은 자연스레 왕정 폐지와 공화주의란 ‘혁명적’인 사상과 맞물렸다. 이 때문에 다윈은 “진화론이 지니고 있는 ‘무신앙’과 ‘혁명’이라는 원초적인 모체에서 진화론을 떼어놓기 위해” 고민했다고 스토브는 지적한다. 어떻게? “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인 인간의 기원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주 철저하고도 묘한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의 지적 무기고에 들어 있는 요소”였다. ‘진화의 실마리’를 푼 논리를 제공해준 게 반계몽주의의 화신이었던 토머스 맬서스였다는 점은 그래서 지독한 역설이다. 스토브는 “인구는 주로 식량 획득의 어려움 때문에 제한된다는 맬서스(그리고 다윈)의 생각이 옮은 것이라면 영국은 아주 오래전에 귀족들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의 말에 손뼉 친다.

‘적자생존’을 지나치게 강조한 진화론자들이 자연스레 우생학으로 흘러간 역사에 대한 ‘경계’도 빼놓을 수 없다. “피임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생존경쟁을 억누르는 위협 중 하나”로 인식했던 다윈이 남긴 유산일 게다.

생의 황혼길에 ‘인간’이라는 ‘종’에 천착한 철학자의 치열함이 흐뭇하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인본주의자의 인간예찬론’으로 읽으면 족하겠다. ‘우리 시대의 에라스무스’라고나 할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