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대파는 고추를 돕고, 수수는 배추를 돕고

벌레 방지하고 그늘 만들어주고… 작물들 서로 도우며 자라
등록 2024-10-11 16:22 수정 2024-10-14 09:03
다양한 작물이 심겨져 있는 이종란 영농법인 대표의 밭.

다양한 작물이 심겨져 있는 이종란 영농법인 대표의 밭.


벼멸구가 창궐했다. 논 가운데 구멍이 난 듯 벼가 누렇게 말라 죽었다. 작년에 해거리를 했는데, 올해도 해거리인 건가. 감나무 감도 대부분 떨어졌다. 배추는 어떤가. 대부분 녹거나, 벌레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후위기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 9월 말까지 덥더니, 10월이 되자마자 선선하다 못해 춥다. 농사짓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문명은 이제 대멸종을 기다려야 할까.

늦게 심은 배추 중에 살아남는 게 있었다. 그늘진 곳이다. 수수 심긴 곳 밑에 심으니 오랜 시간 그늘에 노출돼 시원함을 유지했다. 배추는 싱그럽게 잎을 펼쳐냈다. 일반 관행 논은 누렇게 말라 죽었지만, 우리 논엔 벼멸구가 없다. 토종벼인 북흑조와 붉은차나락을 같이 심었다.

토종씨드림의 토종씨앗 교육 프로그램인 씨드림학교 현장학습에 진행자로 참여했다. 이날 찾아간 곳은 전북 완주 영농조합법인 씨앗받는농부다. 자연농과 토종씨앗으로 농사짓는다. 이곳은 다양한 토종 모종을 길러 판매하고, 토종 검은찰옥수수를 성공적으로 재배해 많은 소비자에게 맛을 보여준 곳이다.

이른 점심과 이론 강의를 끝내고 영농법인 공동 텃밭, 이종란 대표와 진남현 조합원의 밭을 둘러봤다. 완주군 봉동읍은 생강 농사로 유명하다. 조합원 대부분이 생강을 심었다. 이들은 전통 방식으로 생강 농사를 짓는다. 오랫동안 한곳에 농사를 지어도 지력이 고갈되지 않는다. 생강 심고, 그 위에 참나무를 덮는다. 참나무는 훌륭한 멀칭(땅을 짚이나 비닐 따위로 덮는 일) 재료와 거름이 된다. 덮은 곳엔 수많은 벌레가 생기는데, 이를 새들이 쪼아 먹고 거름을 만들어준다. 고랑에는 보리를 심는다. 이 보리가 자라 씨 맺히기 전에 베어 생강을 덮어준다. 참나무와 보리가 그늘 역할을 해주어 서늘한 곳에서 잘 자라는 생강을 도와준다.

영농조합법인 씨앗받는농부의 밭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공통된 점이 있다. 다양하게 심는 것이다. 진남현씨 밭엔 고추와 배추가 같이 심겨 있었다. 배추는 고추 그늘에 가려 시원하게 자랄 수 있었다. 배추도 다양한 종류를 심었다. 네 종류를 심었는데 세 종이 토종, 한 종이 개량종 배추였다. 토종배추는 엇갈이배추, 무릉배추, 150일배추다. 개량종 배추만 자꾸 벌레가 먹어 다시 심었다. 토종 세 종은 풍성하게 잎을 피웠다.

영농법인 공동 텃밭에도 다양한 작물이 심겨 있었다. 두둑마다 ‘고대옥생’(고추, 대파, 옥수수, 생강)을 심었다. 대파는 고추의 벌레를 방지해주고, 옥수수는 생강을 그늘지게 했다. 서로서로 돕는 형태의 밭을 만들어 농사지었다. 이종란 대표의 밭은 수년간 투입한 풀 거름으로 땅이 비옥했다. 이 밭도 고추 조금, 생강 조금, 콩 조금, 그 옆에 수수 조금. 어디에 뭘 심어놨는지 헷갈릴 정도로 다양하게 심어놨다.

최재천은 저서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하여’에서 미국 하버드대학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굴드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진화의 다른 이름은 다양화.”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진화가 아니라 퇴화를 하고 있다. 몇천만 평에 벼 한 종을 심고 있으니 말이다. 벼멸구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들에겐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문제는 다양성 부족에 있다. 사람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다양해야 한다. 다양성이 살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을 때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다.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