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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우상’을 파괴한 영웅

등록 2007-12-07 00:00 수정 2020-05-03 04:25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의 일생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우리의 20세기는 파시스트들을 뒤엎은 뒤, 독립국가 내에 독버섯처럼 틀어앉은 새로운 권위주의 및 정치권력과 싸운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지만, 새로운 권위주의와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됐고, 선각자를 찾기도 힘들었다. 파시스트를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영웅’과 ‘태양’이라 자처했고, 그들에 대한 저항에도 역시 목숨을 바칠 각오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인생은 때로 로맨틱해 보인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물며 한·중·일 3국을 무대로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85년을 살다 간 이의 삶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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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내가 있다. 1916년 식민지 조선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보성고보에 재학 중이던 1935년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품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37년 9월 중국 최고의 무관학교인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군사훈련을 마친 뒤 조선의용대 창립 대원으로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망국 30돌인 1940년 8월29일 그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전선을 떠돌기를 4년여, 1941년 12월12일 사내의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의 작은 마을 후자좡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중 눈먼 총알이 날아와 그의 대퇴부에 박혔다. 그는 후자좡 전투 10돌을 기념해 쓴 ‘준엄한 나날들’이란 글에서 “탄알이 뼈를 깎고 지나간 다리는 쇠절구처럼 무거웠고, 목구멍에서는 확확 겻불내가 났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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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그는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지만, 회유와 협박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야비한 일제는 피고름으로 악취가 진동하는 그의 다리를 방치한 채 1943년 4월29일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가뒀다. 부상을 당한 지 4년여 만에 그는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해내야 했다.

해방은 도적처럼 찾아왔고,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으로 돌아온 조국에서 그는 총 대신 펜을 들었다. 조국의 남쪽에서는 이미 분열의 조짐이 깊어만 갔고, 항일투쟁의 ‘영웅’은 ‘우상’이 돼가고 있었다.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북쪽으로 건너왔지만 그가 보기에 “이때의 평양은 옹근 도시가 일종의 기이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시민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 마치 무슨 밀도 높은 공기처럼 갖가지 형태의 김일성이 숨 막힐 지경으로 꽉 들어차 있는 느낌”이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주변의 권유로 다시 국경을 넘은 그는 항일투쟁 당시 동지들의 도움으로 베이징을 거쳐 1952년 옌볜에 자리를 잡았다. 이념의 열정이 충만한 그 시절, 그는 또 다른 ‘우상’을 목격했다. 1957년 41살의 나이에 우파분자로 몰려 숙청됐지만, 침묵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1966년 완성한 란 작품에서 “과장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문학은 현재 ‘마오쩌둥 시대의 아침이여’ ‘김일성 시대의 낮이여’ ‘호찌민 시대의 저녁이여’ 이런 기성 문구들로 대체될 실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통렬한 비판은 비수가 돼 그에게 돌아왔다. 1967년 51살의 나이에 투옥된 그는 1977년 만기 출소할 때까지 10년 세월을 다시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1980년 12월 복권돼 25년 만에 작품활동을 재개했을 때 그의 나이 65살이었다. 그럼에도 대문에 ‘한인면진’(한가한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오)이라 써붙이고, 창작에 몰두해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렇게 다시 20년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홀연히 찾아온 죽음을 태연히 맞았다. 유언에 따라 그의 주검은 화장돼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로 보내졌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린 그 사내의 일생을 다룬 (김호웅·김해양 편저, 실천문학 펴냄)은 우리 민족의 지난 세기를 오롯이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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