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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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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엄마를 위한 기도

등록 2007-04-25 00:00 수정 2020-05-03 04:24

10살에 압록강을 건너 동대부중 골잡이로 우뚝 선 새터민 소년 유성이의 작은 소망

▣ 송호진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dmzsong@hani.co.kr

“함경북도로 가자.”

엄마는 ‘이사’라고 했다. 몇 벌의 옷만 들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떠나는 이상한 이사였다. 기차로 어디론가 한참을 가는가 싶더니, 험한 산을 타기 시작했다. “바람이 엄청 불었어요.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추웠죠. 12월이었으니까. 그렇게 산을 넘는데….” 빠르면서도 조심스러웠던 엄마의 걸음이 엇박자를 내다 뚝 멈췄다. 엄마는 산을 지키던 인민군의 손에 잡혀 뒤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두 모자의 한겨울 ‘이사’를 돕던 사내가 바동거리는 아이를 제 품으로 더 끌어당겨 속도를 냈다. 그럴수록 엄마와 더 멀어졌다. “붙잡혀가는 엄마를 봤어요. 내려달라고, 엄마한테 가겠다고 했어요. 울음이 나왔는데. ‘가면 너도 죽는다’며 입을 막는 바람에….” 첨벙첨벙첨벙. 그 물이 압록강이었다는 걸, 애초부터 수심이 얕은 코스가 선택됐다는 걸, 산을 넘어 넘어 도착한 곳이 함경북도가 아닌 중국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이었다. 소년은 겨우 1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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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함경남도 시골에서 태어났다. “땅을 빌려 콩, 보리 등을 심어 그걸 엄마가 시장에 내다팔곤 했죠. 애들하고 산천을 뛰어다니며 놀았는데, 이젠 그 애들 이름도 다 까먹었어요. TV는 잘사는 집에 한 대 있어 그곳에 모여들어 봤는데, 그 집 아들이 일을 열심히 해 당에서 줬다나?” 아빠는 소년이 7살 때 세상을 떴다. “방학이라 외할머니 집에 있었는데 전화가 없어 아빠가 돌아가신 3일 뒤에 전보가 왔어요. 아빠가 쉬는 날이면 강가에 도시락 싸고 가서 놀 때 참 좋았는데.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담배를 많이 피우셨대요.” 그는 먼저 북을 나온 아빠의 지인이 ‘이사’를 주선한 것 같다고 떠올렸다.

“‘우리 엄마 언제 와요?’ 하고 묻기만 했어요. 문밖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죠.” 소년은 중국의 한 교회에서 1년 반을 있다가 “엄마도 곧 데려온다”는 말을 굳게 믿고 먼 길을 떠났다. “밤을 꼬박 새워 논밭을 지나고 산 몇 개 타고 중국 국경을 넘어가는데…. 보초 서는 사람들이 불빛을 막 비추고.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베트남으로 갔고, 캄보디아에서 또 7개월을 지낸 뒤 타이를 거쳐 몇 명의 북한 사람들과 남으로 왔다. 소년이 처음에 알아듣지 못한 진짜 이사는 이렇게 끝났다. 엄마 없는 반쪽짜리 이사였다.

“왜 축구를 하니?”

“프로 선수가 돼서 돈도 벌고 이곳에서 국가대표도 되려고요.”

또래 축구 선수들과 다를 바 없는 꿈처럼 보였다. 그러나 16살인 그가 어머니가 지어줬다는 ‘양유성’이란 이름만은 남쪽에서도 바꾸지 않는 고집스런 대목에선, ‘왜 축구를 하니’란 물음이 한 번 더 필요했다.

“엄마를 곧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내가 이곳에 왔는지, 살아 있는지 엄마는 알지 못하잖아요. 유명한 축구 선수가 되면 내 소식이 전해질지 모르지만…. 축구로 국가대표도 되고 해외에도 진출해 돈을 많이 벌면 엄마를 도울 수 있을지 몰라서.”

힘든 건 훈련이 아니라 그리움

국가정보원 조사와 새터민 교육을 받은 유성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부에 들어갔다. 북에서 먼저 건너와 유성이를 돕는 아저씨가 반대했지만, 유성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쪽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는데 애들하고 공을 많이 찼어요. 시장에서 산 거라 일주일 차면 가죽이 뜯어졌지만 정말 재밌더라고요. 북한에서도 축구가 인기 종목인데, 평양 같은 대도시에 나가야 축구부가 있어 정식으로 차지는 못했어요. 참, 동네 TV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 북한이 이겼던 옛날 경기도 본 적이 있거든요.”

“중국에 있으면서 한국 드라마를 본 게 이곳에서 적응하는 데 좀 도움이 됐어요. 차인표가 나온 드라마도 봤어요. 배우들이 염색한 게 참 이상하긴 했지만.”

유성이는 남쪽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지만, 다른 말투 탓에 난처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너 북에서 왔니?’하고 물으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해요. 그래도 좀 이상하다 그러면 얼른 화제를 돌리곤 했죠.”

유성이는 동대부중 축구부 숙소에서 지낸다. 노영 감독과 학교의 배려로 축구부 회비도 면제받고 생활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홍명보장학회의 후원도 받았다. 유성이는 조그만 자신의 옷장 안쪽에 마치 고향 산천을 연상시키는 그림엽서를 붙여놨다. 친구가 빌려줬다는 휴대용 오락게임기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의 주스트라이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고생해서 그런지 참 잘 이겨내고 있죠. 성실하고 마음가짐이 좋아서 앞으로 잘될 것 같아요.” 노영 감독의 칭찬이다.

유성이는 지난해 서울시축구협회장배 1·2학년 대회에서 동대부중이 우승할 때 골잡이답게 6경기 중 혼자 4골을 넣었다. 키도 180cm까지 자라 축구부에서 두 번째로 크다. 유성이에게 왜 14번을 달았냐고 묻자, “(프랑스 국가대표 공격수) 티에리 앙리가 14번이잖아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유성이는 “김남일도 좋아해요. 팀의 정신적인 지주이니까. 그 카리스마가 멋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신은 아직 부족한 게 많다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새벽, 오후, 저녁 세 번 훈련해요. 감독님이 자세를 낮춰 빨리 움직여야 수비수를 쉽게 제칠 수 있다고 말씀하세요. 순발력이 떨어지거든요. 30분씩 줄넘기를 열심히 하고 있죠.”

유성이는 정작 힘든 건 고된 훈련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리움’이란 단어를 썼다. 많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도 없다. 요금도 문제이지만, 마땅히 걸 곳도 없어서다.

“숙소에서 밥이 잘 나와요. ‘이걸 엄마한테 사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축구부원들이 집으로 가면…. 엄마가 보고 싶어도 꾹 참아요. 그러곤 교회에 가서 손을 모아요. 기도요? 매번 똑같은데…. 우리 엄마 잘 있게 해주시라고, 아프지 않게 해주시라고,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있게 해달라고. 내가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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