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교수는 과거의 제도들에만 매달리며 진보성을 상실했다
▣ 김창근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1997년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해 한국 경제에서 극적으로 강화된 신자유주의는 한국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다시 극적으로 강화될 신자유주의 정책의 본질은 국내외 대자본을 위한 정책이라는 인식이 확립돼가고 있다. 최근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발전국가론’을 제기했다. 이 글은 장하준 교수 등의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을 ‘진보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제도만 있고 계급은 없나
발전국가론은 원래 시장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됐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경제 영역을 ‘시장에 맡기면’, 즉 모든 경제 영역을 시장을 중심으로 ‘개혁’하면 경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실제로는 노동 유연성, 민영화, 자유로운 국제적인 상품과 자본의 이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경제 전역에 걸쳐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고 사회의 양극화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확대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구조조정이 ‘좋은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좋은 제도’ 또는 ‘나쁜 제도’와 같은 ‘제도’의 관점은 허구이며, 오히려 그러한 ‘좋은 제도’가 다양한 계급·계층에 미치는 계급적 관점에서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발전국가론은 이론적으로 ‘제도학파’에 기초해,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과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을 일정한 ‘제도’나 그것의 변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장하준 교수도 자신의 작업을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에 입각한 접근”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안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의 결과”라고 규정한다. 물론 이러한 발전국가론은 ‘반미의식’과 민족주의에 기초하면 호소력을 갖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양자는 모두 ‘제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계급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다. 차이점은 단지 ‘좋은 제도’가 어떤 것인가뿐이다. 둘째, 두 이론 모두 자본 편향적인 이론인데, 신자유주의는 자본에 유리한 ‘시장’을 조성하자는 것인 반면,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보호와 혜택에 의한 재벌들의 자본 축적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다. 셋째, 발전국가론은 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목표로 하는데, 계급적 관점의 부재 때문에 어떤 특정한 제도가 왜 생겨나서 변화되고 다른 제도로 변화하게 되는가, 또한 어떤 제도는 어떤 시기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는데, 왜 다른 시기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신장섭·장하준 지음, 장진호 옮김, 창비 펴냄)에서 신장섭·장하준 교수는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을 ‘한국 경제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국가, 은행 그리고 재벌 간의 긴밀한 제휴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세우고 그 정책에 따라 은행을 통해 외자와 내자를 특정 부분에 집중적으로 배분하며, 수출 실적 등을 통해 기업들의 활동을 규율한다. 재벌은 다양한 부문의 계열사를 통해 ‘범위의 경제’를 누리며, 그 때문에 대규모 자본을 조달해 위험성이 높은 대규모 투자계획, 특히 중화학공업에 과감하게 투자한다. 그리고 이런 ‘국가-은행-재벌’ 체계가 한국의 ‘경제적 기적’을 이룬 원인이 된다.
이러한 발전국가론은 국가와 재벌의 역할만을 강조할 뿐, 냉전과 미국의 사회주의 봉쇄전략이라는 대외적 요인과 한국전쟁과 토지개혁, 그리고 4·19혁명이라는 역사적 요인,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 및 초과 착취’라는 내부적 요인들은 주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실제 한국 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특혜로 제공받은 기업들, 주로 재벌기업들이 억압적 반공체제 아래에서 노동자들을 초과 착취해 제품을 생산하고 관대한 미국 시장에 수출해서 성공했다.
국가-은행-재벌 모델은 특수한 현상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국가-은행-재벌’의 밀접한 관계라는 한국의 모델은 국내 자본의 상당 부분을 원조와 차관에 의존하는 경제에서 국가가 외자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적 현상이다. 둘째, 4·19혁명으로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힘이 약한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국가의 정치적 힘이 막강한 상황에서 국가 주도의 자본 축적이 가능했다. 셋째, 한국 경제의 급성장은 산업정책보다는 노동 초과 착취와 안정적인 대외 시장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결국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은 ‘유리한 대외 조건’ ‘강력한 국가’ ‘약한 자본’ ‘억압된 노동’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한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역사적 조건들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한국의 위기의 원인이 ‘국가-은행-재벌’간의 관계라는 ‘잘못된 제도’이기 때문에, 기업과 은행을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조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신장섭·장하준 교수는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이 ‘발전국가의 지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해체’였다고 주장한다. 이미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때부터 그 모델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김영삼 정권 때 결정적으로 붕괴됐다는 것이다. 주요한 정책은 경제기획원 폐지, 금융 자유화와 개방 등이다. 그들은 그 모델의 붕괴 과정에서 경제기획원이 폐지되고 과잉중복 투자가 나타나게 되고, 금융 부문 규제가 미흡한 상태에서 시행된 금융 자유화와 개방으로 인해 과다한 단기 외채 문제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 결과는 재벌들의 부도 사태와 외환위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장섭·장하준 교수는 대안으로 좀더 민주적인 ‘과거’ 모델을 제시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과 발전국가론은 모두 1997년 위기의 원인을 한국 자본주의에만 ‘특수한’ 위기로 간주한다. 전자는 발전국가 모델 때문에, 후자는 그 모델의 ‘해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1980년대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 위기, 1998년 헤지펀드인 LTCM과 엔론의 파산, 그리고 2000년 정보기술(IT) 산업의 과잉투자와 주가 폭락 등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의 선진적인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미국 경제에서도 한국과 같은 ‘천민’ 자본주의의 특징인 정치적 부정부패, 무분별한 대출, 회계 부정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본다면 1997년 한국의 경제위기도 한국에만 특수한 위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위기로 간주해야 한다.
한국의 재벌들도 1990년대 초반의 세계 경제 침체와 그에 따른 수출 위축 그리고 이윤율 하락에 직면했고, 이른바 ‘세계경영’을 하는 초일류의 초국적 자본으로 확장해나가려고 시도한다. 이미 재벌들은 1980년대 3저 호황을 계기로 급성장해 1990년대 초반에는 국가 정책을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경영에 필요한 대규모 투자를 위해 한편으로는 싼 외국 자본을 차입하기 위한 외환시장 개방을,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 위축에 대한 대응으로서 문어발식 확장을 정부에 요구해 관철했다. 그 결과는 외국 자본과 국내 자본의 과도한 차입에 기초한 자본의 급격한 팽창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의 과잉투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 때문도 아니며, 그렇다고 발전국가론에서처럼 그 모델의 붕괴에 따른 것도 아니다. 단지 끊임없이 팽창하려는 속성을 가진 자본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또 거대 자본이 성장한 상태에서는 국가가 막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과잉투자에 대한 올바른 대안은 ‘영미식 자본주의’로의 제도 개혁을 명목으로 한 구조조정도 아니며, 과거 모델로의 ‘회귀’도 아니다. 문제는 이윤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팽창하려는 자본의 문제일 뿐이다.
재벌에 외환위기의 책임은 없다고?
신장섭·장하준 교수는 “재벌들은 주연이라기보다는 본질상 조연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외환위기에 대한 재벌의 책임을 사실상 면제해주고, 발전국가 해체의 결과로 나타난 금융 감독의 부실에 모든 책임을 돌리려 한다. 물론 한국 정부가 정확한 외채 규모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정책 실패를 범했지만, 그런 잘못이 없었다고 해서 과잉투자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의 재벌들은 투자 열풍, 즉 팽창욕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장섭·장하준 교수는 현재 장기 침체의 원인을 ‘제조업 투자 부진’에서 찾고, 또한 투자 부진의 원인을 단기적인 주주이익에 주로 봉사하는 영미식 금융 시스템에 돌린다. 하지만 한국 재벌들이 현재 자금이 없어 투자를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최근에 투자의 양극화가 나타나 내수산업의 투자는 정체된 반면 수출산업의 투자는 호황을 누렸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소비 성향이 급격히 줄어들고 그 결과 내수투자가 위축된 것이 전체적인 내수성장을 위축시킨 원인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정부도 재벌도 원하지 않는 가상의 대안
장하준 교수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한적인 무역·산업정책 또는 민주적인 발전국가를 제안한다. 그런데 현재의 재벌들은 장하준 교수가 인정하듯이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틀을 벗어나려 시도해왔고, 세계화에 편승하는 것이 자신들의 자본 축적에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산업정책의 주체인 한국 정부도 산업정책을 통한 재벌들의 자본 축적보다는 세계화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재벌들의 자본 축적을 가속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결국 그런 시도는 한-미 FTA뿐만 아니라 한-일, 한-중, 한-EU와의 FTA로 나타날 것이다. 그 목적은 노동자와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 등을 희생시키더라도 재벌들을 초일류·초국적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장하준·정승일 교수는 에서 산업정책을 위해 노동자들이 자제하고 정부와 재벌들에 협조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재벌들도 원하지 않고, 정부는 그럴 의사도 없는 ‘가상의 정책’에 노동자들이 목을 매라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의 ‘제도들’에 몰입한 나머지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그 결과 진보적인 성격을 완전히 상실한 주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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