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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누군가 이순신을 죽이고 있다?

등록 2004-09-16 00:00 수정 2020-05-03 04:23

TV 드라마를 계기로 출판가를 평정한 ‘이순신 열풍’… 민족주의는 새로운 ‘몸’을 얻었는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3월14일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의 넓은 책상에 앉아 느닷없이 쏟아지는 시간을 독서로 달래고 있었다. TV 카메라는 친절하게도 책의 제목까지 비춰주었다. (생각의 나무 펴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을 읽으면서 집무정지 상태인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위기의 시대라고?

는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TV 카메라 덕인지 대통령 덕인지, 그런 쓸데없는 장치 없이도 김훈씨의 작가적 역량이 국민의 심금을 울리게 돼 있는 일인지 확실하진 않아도, 쑥쑥 자라나는 책의 판매량만은 확실했다. 지금까지 는 60만질, 청소년용으로 개작된 것은 5만질이 팔렸다. 처음에는 완전한 ‘단독 드리블’이었다. 기사들은 이순신의 위대함보다는 김훈씨의 문장과 고독한 인간의 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10년 만의 더위와 함께 ‘이순신 열풍’이 찾아왔다. 갑자기 거북선의 총통이 불을 뿜어내듯 사방에서 이순신 관련 책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후발주자 중 선두를 달리는 책은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모두 8권의 분량으로 이순신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황금가지 펴냄)이다. 2만질이 팔려나간 이 소설은 한국방송(KBS) 드라마 의 공동 원작으로 선정되면서 베스트셀러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역사서들도 속속 시동을 걸었다. (김종대 지음, 북포스 펴냄), (김태훈 지음, 창해 펴냄), (이민웅 지음, 청어람미디어 펴냄) 등이 5천부 안팎에서 열풍을 타고 기지개를 펼 태세다. 여기에 (김덕수 지음, 밀리언하우스 펴냄) 같은 노골적인 실용서까지 가세했으니, 무덤 속의 이순신 장군은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역사서들의 특징은 전문가보다는 주로 민간 연구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 지은이 김종대씨는 현직 판사로, 군에 있을 때 정훈교육 자료를 읽다가 관심이 생겨서 연구를 시작했다. 을 쓴 김태훈씨는 한국은행연합회에 근무하는 직장인으로, “원래 역사 속 영웅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인 영웅을 찾다가 이순신을 만났다”라고 밝혔다.

어린이 출판시장도 뜨거워지고 있다. 원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등의 위인전은 고만고만하게 나가는 편이었으나, 최근 ‘이야기 고전’ ‘꿈동산 위인전기’ 등의 부제를 달고 나온 이순신 장군 전기가 다른 영웅들을 멀리 제쳤다. 재출간 붐도 활발하다. 난중일기가 먼지 쌓인 출판사들의 서고에서 부활한 것은 물론이고, 일제시대에 나온 이광수의 소설 마저 호출됐다. 교보문고 남성호 홍보팀장은 “아직까지는 판매쪽에서 반응이 크지 않으나 교모문고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서 이순신이 2위라는 점을 주목한다. 드라마가 계속 방영되면서 베스트셀러 안에 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보문고는 별도로 매장 안에 이순신 코너를 만들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판 편집자들에게 ‘우리도 한번 내볼까’라는 고민을 안겨준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출판계 인사들의 분석은 한결같다. 바로 ‘위기의 시대’라는 인식과 TV 드라마 방영이라는 호재. “태평성대에는 세종대왕이 뜨지만, 민중들은 현재가 위기라고 생각할 때마다 이순신을 호출했다. 정조, 일제, 70년대가 그랬다. 이순신의 위기의 리더십은 굉장히 빛난다.” 황금가지 장은수 편집부장의 진단이다. 지은이들의 지적도 여기서 빗나가지 않는다. 를 지은 이민웅 교수는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위기상황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위기의 시대는 ‘원소스 멀티 유즈’의 시대이기도 하다. 모든 유행을 선도하는 드라마가 공중파를 탔으니, 소설과 역사서와 만화가 쏟아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위기의 시대’라는 담론은 무엇이 위기인가라는 치명적인 질문과 부딪히면 별 답이 없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위기가 아닌 때는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그렇다면 한 세기 동안 전국 서점 매장의 반은 늘 이순신 관련 책들로 넘쳐나야 하지 않은가. 정권의 저열한 캠페인이 아닌 이상, 지금과 같은 자생적인 이순신 열풍이 일어난 적은 거의 없다. 우리는 무언가 은밀히 숨어서 부채질을 해대는 다른 원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을호에 문화평론가 김성기씨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짧은 시평을 기고했다. 이 글은 중국이 자국의 현실 위기를 봉합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으로서 상업 문화 성격이 짙은 대중 민족주의를 표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국에서 장이모 감독의 계열 영화가 그런 과정에 깊이 밀착하고 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순신 책이든 다른 정치적 색채를 가진 영화든 지금처럼 인기를 끄는 것은 동북아에서 충돌하는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해 평론가들이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 것이다. 왜 이야기가 안 나오는지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비애’의 구름과 함께 오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스트레이트’를 날리면서 시작된 여름, 우리의 미약한 ‘카운터 펀치’는 우리 안의 민족주의였다. 서양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우리는 외부의 계기를 통해 민족주의를 재인식해왔다. 이렇게 부활한 민족주의는 뼈와 살을 가진 몸을 필요로 했고,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몸’이었다. 굳이 이순신이 아니어도 요즘 우리는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아다니고 있다. ‘님’은 안중근일 수도, 광개토대왕일 수도, 박정희일 수도 있다.

이순신은 ‘비애’라는 정서의 구름과 함께 도착했다. 근대계몽기 민족주의의 탄생부터 영웅은 늘 그렇게 왔다. (책세상 펴냄)에서 고미숙씨는 근대 초기에 피, 눈물, 칼, 죽음 등의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수사학이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이때부터 영웅은 에로틱한 정념을 발산하는 슬픈 님으로 바뀐다. 즉, 민족이라는 텅 빈 기호를 ‘한’이라는 과잉 정서를 통해 메우려는 오래된 습속과 동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순신이 아니더라도 민족주의의 페르소나들은 슬퍼야 한다(생각해보자.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이 펴낸 책 제목이 왜 일까. 이 책은 ‘애국자’ 박근혜와 박정희에 바치는 비애감으로 가득차 있다).

언제부터인가 문화적 트렌드를 정치적으로 비평하는 것은 ‘촌스러운 짓’이 됐다. ‘오버’하지 말자. 이순신 열풍을 동북아의 민족주의와 연결짓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이순신은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고, 그를 소비하는 것은 TV 드라마에 편승한 한때의 유행일지 모른다. 그러나 불쑥불쑥 이런 불안감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불멸로 만드는 자들이 결국,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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