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결혼에 골인한 김철수(45·가명)·박영희(41·가명)씨는 1남1녀를 둔 부부다. 경북 지역에서 살림을 꾸려가던 부부는 2008년 처가가 있는 경기도로 거주지를 옮긴다.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처가가 운영하는 가게일을 도왔지만, 처가 식구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둔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 건 그 무렵이었다. 김씨는 별다른 직업 없이 지내면서, 아내의 남자 관계를 의심해 한 달에 2~3회씩 폭력을 행사했다. 폭력 뒤에는 강제적인 성관계가 따랐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2011년 어느 날, 김씨는 아내를 부엌칼로 위협해 상처를 입혔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이틀 뒤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남편은 아내를 승용차에 강제로 태워 32시간 동안 지방 각지를 끌고 다니기까지 했다. 친정 식구들의 신고로 김씨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아내는 감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남편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고 처가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김씨의 죄목은 무엇일까. 흉기를 갖고 폭행을 했다. 감금도 처벌 사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어떤가.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할까.
쟁점 ‘부녀에 아내도 포함되느냐’2012년 5월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은 특수강간 등 범죄 혐의가 인정된다며 김씨에게 징역 6년에 정보공개 7년,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10년을 선고했다. 같은 해, 서울고등법원은 “부부 사이라도 폭행·협박 등 강제로 성관계를 할 권리까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지난 5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김씨의 유죄를 인정하며 징역 3년6개월에 정보공개 7년,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10년을 확정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 사이의 강간죄를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1970년 이후 대법원이 유지해온 ‘실질적인 부부 관계가 유지될 때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례가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심각하게 유린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국가가 부부간 성생활이라는 이유로 개입을 자제한다면 개인 존엄성과 양성평등에 기초한 혼인생활을 보장할 국가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이번 선고에서 쟁점이 된 부분은 구형법 제297조 강간죄 규정 중 ‘폭행·협박을 동원해 부녀를 간음한 경우’의 부녀에 아내도 포함되느냐였다. 지난해 말 형법 개정으로 강간죄 대상이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돼 남성 등도 포함됐다. 대법원 다수 의견은 “‘부녀’란 성년이든 미성년이든, 기혼이든 미혼이든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며 “민법 제826조 제1항에 배우자와 성생활을 함께 할 의무가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폭행·협박에 의해 강요된 성관계를 감내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반면 이상훈·김용덕 대법관은 ‘간음’의 사전적 의미는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이고 강간은 ‘강제적인 간음’을 의미하므로, 강간죄 대상에서 ‘아내’를 제외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강간죄로 처벌하지 않아도 폭행 또는 협박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부부 사이 성폭력, 기소조차 되지 않아여성계에서는 1990년대부터 부부간 성폭력 처벌을 요구해왔다. 1986년 유럽의회는 혼인과 상관없이 모든 강간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으며, 독일은 1997년 형법을 개정해 부부 강간을 범죄로 규정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1999년 한국 정부가 부부 강간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대법원 판례의 영향으로 부부 사이의 성폭력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법원 입장에 변화가 생긴 건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2004년 서울지법은 성관계를 거부한 아내를 폭력적으로 강제추행하고 상처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남편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당시 검찰은 고심 끝에 강간 혐의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남편을 기소했다. 2009년에는 부부 강간죄를 인정한 판례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부산지법은 외국인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편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부부 사이의 강간 피해가 외부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2010년 여성가족부의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 여성 중 성적인 폭력을 당하는 경우는 70.4%에 육박한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은 “가정폭력 피해자들도 남편으로부터 당한 성폭력에 대해 언급하길 꺼린다.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의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안타깝게도 부부 강간 피해가 매우 많았다”고 말했다.
신체적 폭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부부 강간은 일어날 수 있다. 2004년 대전 및 충북 지역 기혼여성 44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작성된 논문 ‘우리나라 부부의 결혼생활과 아내강간’(유공순·이화정)을 보면, 응답자의 57.9%가 남편의 강요로 성관계를 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남편의 강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한다’(37.4%)는 답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심한 욕 등 언어폭력’(10.9%), ‘언어폭력과 신체적 폭력 동반’(7.6%) 등의 순이었다. ‘흉기로 위협한다’는 응답은 2.1%였다.
신체적 폭력 없이도 부부강간 일어나원치 않는 성관계가 발생했더라도 모두 강간죄로 처벌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에서는 폭행 및 반항 정도, 가해자와의 관계 등을 따져 피해자가 얼마나 ‘무력화’됐는지를 고려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통념이 개입돼 피해자에게 불리한 판단이 나온다는 비판이 많았다. 대법원은 “남편이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가하는 경우에 강간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어느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범죄가 성립되는지 모호하다. “폭행에 이르게 된 경위, 평소 부부간 관계, 폭행 당시와 그 이후 사정을 종합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대법원이나 하급심이 부부 강간으로 인정한 사례를 보면, 남편이 흉기로 협박하거나 상해를 가하는 등 피해자가 극한의 공포를 느꼈을 법한 상황이 대부분이었다. ‘여성폭력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동행동’은 지난 5월 논평을 내어 “대법원의 부부 강간죄 유죄판결을 환영한다”면서도 “심각한 수준의 폭행과 협박을 수반해야 강간으로 인정하는 관행에 너무나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20자평▶오창익 당연하잖아. 내가 싫으면 안 하는 거야.
조혜인 개인은 부부 이전에 개인, 이 인정이 이토록 오래 걸렸다니.
홍성수 당사자가 원치 않는 성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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