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곧 서른넷이 된다. 살아 있다면. 아들은 새해 6살이 된다. 녀석이 엄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지도 4년이 흘렀다.
“약품 리스트 없지만 업무상 재해 아니다”?아내는 1999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 입사했다. 만 19살. 첫 직장이었다. 아내는 ‘식각’ 공정이라 불리는, 반도체를 만들 때 필요한 얇은 원판인 웨이퍼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업무를 맡았다. 아내는 여러 화학물질이 담긴 수조에 웨이퍼를 손으로 직접 담갔다가 빼거나, 가스를 이용해 웨이퍼 표면의 감광막을 벗겨냈다. 3교대 근무라 일은 더 고달팠다. 머리가 아프고 체하는 일도 잦았다. 결국 아내는 2004년 2월 퇴사했다.
그해 12월, 우리는 결혼했다. 이듬해 첫 임신을 했지만 자연유산됐다. 그 뒤론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아 산부인과 진료까지 받았다. 2007년 7월, 어렵게 첫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들이 돌도 되지 않았던 2008년 4월, 갑자기 아내의 몸 여기저기에 파란 멍 자국이 나타났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고 했다. 항암치료와 두 차례의 골수이식 수술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2년도 견디지 못했다. 2009년 11월24일, 아내는 우리 곁을 떠났다.
아내는 건강했었다. 가족 중 혈액 질환이나 암에 걸린 사람은 없었다. 2003년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건강검진 결과에서도 백혈구 수치는 정상이었다.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나서는 농업 관련 회사에서 씨앗을 배양하는 작업을 반년가량 했을 뿐이다. 삼성전자 말고는 백혈병의 다른 원인을 떠올릴 수 없었다.
고 김경미씨의 남편 강아무개씨는 2010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역학조사를 의뢰하고,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재해에 따른 유족급여를 달라’고 신청했다. 아내가 일했던 기흥사업장 3라인은 이미 폐쇄된 뒤였다. 삼성전자는 “당시 사용된 전체 화학물질 리스트를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역학조사평가위원 9명 가운데 7명은 벤젠·포름알데히드 등 백혈병의 원인이 되는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낮았다는 이유를 들어 “업무상 재해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유족급여 지급을 거부했다.
지난 10월19일 서울행정법원 제1부(재판장 이승택)는 강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급성 백혈병의 발병 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김씨가 기흥사업장에 근무하는 동안 발암물질을 포함한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백혈병이 발병했거나 적어도 그 발병이 촉진되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며 강씨의 손을 들어줬다.
접수된 피해자만 138명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노동자에게 ‘업무상 재해’(산업재해)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김경미씨의 옆 라인(3라인)에서 일했던 고 황유미씨와 이숙영씨도 앞서 산재 인정 판결을 받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불복해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자는 138명(사망 56명 포함)에 이른다. 지난 12월18일, 삼성전자 쪽과 유족을 비롯한 반올림 쪽은 △직업병 문제에 대한 사과 △보상 △재발 방지 대책 등 3가지 안건을 놓고 첫 본교섭을 열었다.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과 마주 앉기까지만도 6년이 걸렸다.
심사위원 20자평▶김보라미 근무환경 정보들을 보관·관리·공개하지 않은 이유만으로도 유죄.
유성규 법원이 던진 돌직구, 위험사회를 관통하다.
조혜인 힘겹지만 꾸준하게 반올림!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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