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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연 “내가 신청한 대로 학교에서 전공을 새로 만들어준대.” 태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는 영문학·경제학을 복수전공하던 친구다. 이젠 수학까지 전공한다고 한다. 영문학·경제학·수학을 합쳐 ‘수리금융학과’를 학교에서 새로 만들어준단다. 지금까지 없던 학과다. 과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태호를 위한 학교의 특별한 배려다. 한국은행에 입사하고 싶은 그에겐 분명히 메리트가 될 것이다. 나는 혼잣말한다. ‘학교를 5년 다니다보니 별걸 다 본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건가. 나는 충분히 목마르지 않았나.’
가을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영문과에선 작은 소동이 일어난다. 교직이수를 신청하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학점이 좋은 사람은 그때면 한 번쯤 흔들린다. 교사의 꿈이 없어도 그렇다. 아나운서를 꿈꿔온 동기 지민이도 그랬다. 그는 이미 영문학과 신문방송학을 이중전공하고 있었다. “나중에 혹시 모르니깐.” 지민이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보험 삼아 ‘삼전공’하기로, 10학기를 다니기로 말이다. 문득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선생님이 최고지.” “선생님 되기 싫어요.” 나는 아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솔직해지자. 사실은 낮은 학점 때문이었다. 교직이수를 신청해도 떨어질 게 뻔했다.
삼전공이 나도 부럽다. 취업 경쟁력이기도, 보험이기도 하니까. 나는 영문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한다. 여기서 삼전공을 하려면 등록금이 확 늘어난다. 3학과의 전공 학점을 다 이수하려면 10학기는 기본이고 계절학기도 빠지면 안 된다. 학기 등록금 362만원을 두 차례 더 내고 과목당 30만원짜리 계절학기 수업도 몇 개나 들어야 한다.
복수전공만 하는데도 나는 부모님 눈치가 보였다. 마지막 9학기와 계절학기를 들을 때 엄마는 마이너스 통장을 꺼내야 했다. 학자금 지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빠 회사는 8학기만 무이자 대출을 해준다. 요즘 누가 8학기만 다닌다고 그렇게 지원해주는 걸까. 대학이 9학기로 바뀐 지 오래다. 내가 신입생일 때부터 선배들은 그랬다. 칼같이 8학기를 졸업해도 곧바로 취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8학기에 일부러 15학점만 들었다. 6학점은 9학기를 위해 남겨두었다. 등록금은 120만원. 친구들도 모두 9학기째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졸업 자격을 갖추지만 만약 취업이 안 되면 졸업을 연기할까 고민 중이다. 졸업 연기란 말 그대로 졸업을 미루는 것이다. 휴학하지 않았다면 3년까지 가능하다. 다만 마지막 학기는 1학점 이상을 수강해 등록금의 6분의 1(60만원)을 내야 한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대가다. 또 다른 방법은 졸업에 필요한 영어 성적을 제출하지 않아 ‘수료자’로 남는 것이다. 그러면 졸업이 1학기 자동 연기된다.
“거취를 정해야 하는데….” 요즘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엄마는 거창하게 ‘거취’ 운운하느냐고 놀린다. 하지만 나는 자못 심각하다. 기졸업자와 수료자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을까. 진로 고민만큼이나 ‘신분’ 고민이 크다. 우리는 왜 졸업을 연기할까. 첫째, 인턴십은 대학생만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신입사원 지원 자격을 ‘졸업 예정자’로 못박은 기업도 최근 생겼다. 최근에 뜬 겨울방학 인턴 공고는 이렇다. “인턴십은 예비 사회인인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둘째, 면접에서 “졸업하고 뭐했어요?”라는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서다. 취업에 계속 실패했다고 솔직히 답하면 ‘무능력자’가 돼버리니까. 그런 빌미를 주고 싶지 않다. 실제로 취업에 성공한 선배들은 대부분 졸업 유예자다. 지난 1년간 대학 캠퍼스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최근 페이스북에는 취업 성공 소식이 업데이트된다. ‘드디어 원하던 직무, 원하던 기업에 취업하게 됐습니다.’ 그러곤 어김없이 갓 찍은 졸업사진이 뒤따라 게시된다.
2학년부터 복수전공 할걸노민호 2011년 11월, 2학년 후배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 나는 선거운동을 도왔다. 학교 내 여러 사람들에게 공약을 설명하고 다녔다. ‘발로 뛰는 학생회’가 돼 학생회실에만 박혀 있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한 4학년생이 말했다. “누가 되든 상관없는데, 지금 총학생회장처럼 도서관 열람실에만 처박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네.” 총학생회장이 학생회실도 아니고 도서관 열람실에 만날 있다고?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대.”
술자리에서 그 얘길 꺼냈더니 한 선배가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은 학생회장 하는 게 최고의 스펙 중 하나더라. 학교 관계자와 친해지고 잘 보일 수 있는 기회잖아. 추천서 같은 것도 쉽게 얻을 수 있고.” 총학생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단과대 학생회장도 ‘먹어주는’ 스펙이란다. 학생회장이란 직함은 기업 입장에서 ‘리더십’과 사실상 동일시된다. 중요한 단서 조항이 붙었다. “등록금이다 뭐다 해서 자꾸 싸우면 안 돼. 학교 쪽 말을 잘 들어야지.”
“사학과 나오면 어느 쪽으로 취업해요?”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괴롭다. 최근 취업 준비를 하며 심리검사 상담을 받았을 때 그랬다. 답변 예시가 사실상 없다. 낑낑대며 이렇게 답한다. “오래 공부해 박물관 학예사를 할 수도 있고요, 교직을 이수하면 역사 교사가 될 수도 있어요. 대학원에서 오래 공부해서 교수가 될 수도 있고요.” 참 궁색한 답변이다. 박물관 학예사를 하려면 최소 10년은 연구실에 박혀 있어야 한다. 석·박사 장학금을 조금 받는 것 외엔 수입도 기대할 수 없다. 한국사 임용고시는 목숨을 걸고 해도 합격할까 말까다. “대학원에서 오래 공부해서 교수가 된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정교수는 고사하고 부교수가 되는 데도 사반세기가 걸린다. 우리 과에서 존경받는 50대 초반의 교수는 아직 부교수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떤 선생님은 월급이 140만원이 안 된단다. 나는 경악했다. 곁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역사 공부만 하다간 굶어죽어.”
취업을 준비하는 우리 과 학생은 다 같은 생각이다. ‘제1전공 하나만 마치고 빨리 졸업하면 기업에서 싫어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업은 학생들이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길 바란다’. 기업의 직무교육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어 기업 입장에선 수고를 더는 거라고. 그래서 학교를 몇 년 더 다니는 수고를 우리 취업준비생이 기꺼이 떠안는다. 절반 정도는 경영학을 복수전공한다. 2학년 후배를 경영대학 강의실에서 만났다. 그의 품에 이 들려 있었다. “복수전공은 빨리 시작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안 그러면 학교를 10년 가까이 다니게 되잖아요.” 맞는 말이다. 복수전공을 3학년 때 시작한 ‘늦깎이’로서 절감한다.
시니컬한 형이 있었다. 삼수한 동기인데 학교생활 내내 불만을 토로했다. 역사 공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그 형은 다른 학교로 편입했다. 한동안 서로 연락을 못하다 지난해 2월 동기들이 졸업하는 날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서울 중구의 한 은행 지점에서 일한다고 했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표정이 밝았다. 온화해 보일 정도였다. 동기 수십 명의 술값을 혼자 몰래 계산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영학을 복수전공해서 은행에 가는 게 최선이야.”
9년 만의 졸업장, 기쁘지 않다
이은미 밤 12시. 누군가 옥탑방 철문을 두드린다. 오늘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결근했다. 아파서 종일 누워 있었다. 누군가 문에 기대놓은 벽돌을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가 없는 문이다. 벽돌로 기대놓지 않으면 자꾸만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미다. 걱정이 돼서 왔나보다. 나는 부끄러워져 꼼짝하지 않고 벽을 바라본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자나보네.” 일어나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대로 자는 척했다. 선짓국 냄새가 풍겼다. 유미는 잠깐 뭘 적더니 그대로 조용히 집을 나갔다.
돌아보니 방바닥에 플라스틱 통과 편지 한 장이 놓여 있다. “힘들어도 꼿꼿이 살아가는 걸 보니 참 기특하다. 제발 식비 아낀다고 굶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몇몇 쓸데없는 생각, 잡념은 다 버려라.” 선짓국을 못 먹는 내가 통 안의 검붉은 국물만 들이켰다. 첫 끼니였다. ‘이게 도대체 사는 건가.’
방 안에는 온통 주워온 물건들이 가득하다. 이불은 골목 재활용 수거함에서 가져왔다. 세탁기가 없어 빨지도 못하고 햇볕에만 말린 뒤 쓰고 있다. 주워온 플라스틱 우유 상자를 엎어놓고 보자기를 씌웠다. 밥상이다. 냉장고는 있어야겠다 싶어 동대문 중고시장에서 3만원을 주고 사왔다. 그게 내 돈 주고 산 유일한 물건이다. 당시 나는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노숙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다른 건 그래도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옥탑방이 있다는 것뿐.
200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에 맞는 대학을 나는 갔다. ‘인 서울’ 대학의 끄트머리에 있는 대학이었다. 왜 그랬느냐고?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SKY포카(서울대·고려대·연세대·포항공대·카이스트), 서성한(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 중경외시(중앙대·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 건동홍(건국대·동국대·홍익대), 국숭세단(국민대·숭실대·세종대·단국대), 지국대(지방국립대), 지잡대(지방 잡스러운 대학) 등으로 처참하게 서열화된 한국 대학을 말이다. ‘지잡대’라는 말보다 한국 사회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단어는 없다. 내 대학은 저 중에 끼지도 못한다. ‘국숭세단’ 다음에 ‘인 서울 기타’쯤은 넣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선택한 전공은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이공기타’로 분류되는 보건관리학이다. 자연과학부로 입학해 1학기 마지막 학기에 전공을 택했다. 당시 나는 성적이 바닥이었으므로 1지망에서 떨어지고 2지망인 지금의 전공을 얻었다. 그게 9년 전이다. 9년 동안 나는 적성에 전혀 맞지 않는 보건관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한때 탈출을 꿈꾸기도 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떠났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반수를 한 뒤 지원한 대학의 영화과에서 모두 낙방했다. 부모님은 대학에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대학이 싫어.’ 그 뒤 나는 혼자 살기로 결심했다. 내 힘으로 꿈을 이루고 싶었다. 대학과 맞서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허황된 꿈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돈을 모아 영화 한 편을 찍었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에는 월세와 교통비, 식비, 공과금이 포함돼 있지 않았으리라. 월급 60만원은 나에게 굶지 않을 만큼의 삶만을 허락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돈은, 단언컨대 아니었다.
5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그대로였다. 위풍당당하게 선 본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네가 다시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대학과의 싸움에서 나는 패배했다. 재입학을 하려고 학과장 의견서를 받으러 갔다. 절차는 간단했다. 학과장은 별말이 없었다. 머뭇거리며 건넨 의견서에 몇 줄만 간단히 써내려갔다.
돌아온 학교에서 나는 학점에 목을 맸다. 많은 기업이 지원 자격을 ‘학점 3.0’으로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였던 학점을 3년간 죽어라 노력해 평점 3.83으로 올렸다. 장학금도 탔다. 하지만 몇몇 기업은 ‘학기별 성적’을 모두 적으라고 요구한다. 4년간 꾸준히 스펙에 투신하지 않은 너는 받아줄 수 없다는 듯이. 올해 8월, 대학 입학 9년 만에 졸업장을 하나 얻었다. 이제 고졸이 아닌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날아갈 듯 기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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