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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올해의 판결] 조사과정서 변호인의 적극적 참여권 인정


피의자와 떨어져 앉으라는 수사관 처분은 부당하다는 결정 끌어내
등록 2008-12-26 16:05 수정 2020-05-03 04:25
최명호 변호사

최명호 변호사

지난 6월18일 오전 10시, 최명호 변호사(사진)는 사기 혐의로 고소된 의뢰인 김아무개씨와 함께 인천지검 조사과 조사실에 들어섰다. 두 번째 검찰 조사였다. 최 변호사는 이날 조사 과정의 녹취를 요구했다. 같은 달 5일에 있었던 1차 조사에서 유도성 질문으로 피의자를 불리하게 만든 수사관의 신문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1차 조사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사관은 ‘녹취 신청’을 철회하라고 했다. 최 변호사가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피의자 쪽에서 ‘알아서’ 녹음을 하라고 했다. 최 변호사는 마침 갖고 있던 휴대용 MP3를 책상 위에 꺼내놓았다.

떨어져 앉기 거부하자 수사관이 퇴실 명령

그러자 수사관은 갑자기 최 변호사에게 황당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변호인! 이쪽으로 떨어져 앉으세요.”

피의자와 나란히 앉아 있던 최 변호사를 피의자의 3시 방향으로 약 3m 정도 떨어져 앉으라고 했다. 녹취 신청을 철회하지 않고 녹음을 강행하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게 그렇게 명령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방에서 나가세요.”

최 변호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률에 보장된 변호인 입회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가라니….

최 변호사는 다시 말했다. 언성이 높아졌다.

“정말입니까. 그러면 준항고하겠습니다.”

“준항고가 뭔지 모르겠는데 알아서 해요. 당신이 내 말 듣지 않았잖아.”

최 변호사는 그렇게 검찰청사를 나와 인천지법에 준항고장을 냈다. 판사나 검사, 사법경찰관의 처분이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하는 것이 준항고다. 수사관의 퇴실 명령은,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법원은 7월14일 최 변호사의 준항고를 받아들였다. 인천지법 박종국 판사는 결정문에서 “수사관이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피의자의 옆에 앉아 있는 변호인에게 피의자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 앉을 것을 요구하고, 변호인이 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퇴실을 명한 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을 침해한 처분”이라고 밝혔다. 인천지검은 대법원에 재항고했지만, 대법원 3부(주심 이홍훈)는 “당시 변호인이 피의자 신문을 방해하거나 수사기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은 발견할 수 없다”며 원심을 확정했다.

입회권 침해 관행 바꾸는 계기로

최 변호사는 과의 인터뷰에서 “개정 형사소송법이 적용되면서 일선 현장에서 변호인 참여권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첫 사례”라고 말했다. 우리 헌법에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명시돼 있지만 형사소송법에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은 그동안 변호인의 입회를 꺼렸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판례로 조금씩 시도되던 수사 과정의 변호인 참여는 지난 2007년 ‘사법개혁’의 성과로 형사소송법에 관련 규정이 명시되기에 이른다.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변호인의 참여는 허용돼야 하지만, 이번 사례가 보여주듯 변호인의 존재는 수사기관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다. 최 변호사는 “검찰이 변호인 참여로 겪는 수사상의 어려움을 참지 못하는 이유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며 자백을 강요하는 수사 관행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며 “증거 위주의 과학수사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올해의 판결’ 심사 과정에서 이번 사건을 강력히 추천했던 금태섭 변호사는 “변호인을 수사 과정에서 적극적인 법률적 조언자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금 변호사는 이어 “수사 과정에서 입회권이 침해됐을 때 적극적인 문제제기로 이번과 같은 판례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변호사들의 책무”라고 덧붙였다.


■ 심사위원 20자평
금태섭 변호사도 자기 앉을 자리는 스스로 찾을 수 있다
박영주 검사실은 왜 항상 춥게 느껴질까

이종수 변호사가 옆에 있어야 의뢰인을 돕지


글·사진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2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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