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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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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성 코스

등록 2008-12-11 17:29 수정 2020-05-03 04:25

영국에 오면 텔레비전은 그만 보게 될 줄 알았다. ‘인생의 8할을 텔레비전에서 배웠다’고 자신하는 내게 텔레비전은 자유이자 구속이며, 생명수이자 독가스다(열다섯 살 때던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하루 꼬박 텔레비전을 보다가 토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가 독일이나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라는 사실이 가장 기쁜 순간은, 손바닥 2개만 한 크기의 까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을 때다.
런던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막상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밖에 나가서 노는 건 귀찮고 해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그런 날의 텔레비전 시청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BBC〉 뉴스를 본다. 그리고 채널을 돌리면 부동산 관련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다. 영국에는 ‘이사하고 싶은데 이런 집을 구하고 싶어요’라고 의뢰한 시청자에게 최적의 집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처음에는 ‘뭐 이런 걸 다 보라는 거야’ 했으나 날이 갈수록 부동산 프로그램에 빠져들게 됐다. 개인적으로 이사를 좋아하는데다, 남의 집 구경하는 재미가 어쩐지 쏠쏠하달까. 부동산 프로그램이 끝나면 골동품 프로그램으로 넘어간다. 오래된 것이라면 뭐든 내놓고 팔기 좋아하는 이 나라의 ‘역사 집착증’ 때문인지, 〈TV쇼 진품명품〉처럼 개인 소장품을 감정해주는 프로그램부터 오래된 가구를 찾아다니는 쇼까지 골동품 하나로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은 각양각색이다. 오후가 되면 퀴즈쇼가 시작된다. 가끔씩 같은 시간에 채널 3~4개에서 모두 퀴즈쇼를 방영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나라의 ‘퀴즈’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퀴즈쇼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정답을 맞힌 자와 틀린 자.
퀴즈쇼를 보며 ‘틀린 자’라는 자괴감에 빠질 때 즈음이 되면, 작은 텔레비전은 이렇게 말을 건넨다. “세상이 그렇게 딱딱하고 지루한 것만은 아니야.” 코미디쇼와 토크쇼 시간이다. 영국의 토크쇼나 코미디쇼는 독하다. 이경규나 김구라의 독설쯤은 장난일 정도로 유머의 수위가 높고 강도도 세다(최근에는 최고의 코미디언이자 진행자인 조너선 로스와 러셀 브랜드가 〈BBC〉 라디오에서 무개념 사고를 쳐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재미있다. ‘빙고’ 쇼가 시작되면 밤이 깊었다는 뜻이다. 빙고 프로그램은 반짝이는 조명 사이로 흰색 치아의 오빠와 금발의 언니가 돌아다니면서 진행하는데, 우리로 치자면 ‘도봉구 김정자씨 나셨어요. 축하드립니다’라는 식의 빙고 당첨 소식을 쉬지 않고 알려준다. 새벽이 되면 월드 뉴스를 볼 차례다. 한동안 새벽마다 ‘아시아 주식 시장 폭락’을 긴급하게 알려줬던 〈BBC〉 덕분에, 온종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낄낄대다가 느닷없이 새벽에 나라 걱정하느라 꽤나 잠을 설쳤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제 시즌 마지막 우승자를 향해 가고 있는 도 틈틈이 챙겨봐야 하고, 새 시즌을 시작한 연예인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확인해줘야 하며, 제이미 올리버의 가 끝나고 허전했던 마음을 채워주는 고든 램지의 도 봐야 한다. 각종 특집에 다큐멘터리까지 보려면, 바쁘다 바빠. 이래서 공부는 언제 하냐고? 모르시는 말씀. 이게 다 공부다. 나는 영국의 8할을 텔레비전에서, 속성으로 배우고 있다.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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