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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동네

등록 2008-11-28 17:12 수정 2020-05-03 04:25
흑인 동네. 연합/ AFP

흑인 동네. 연합/ AFP

“헤이!” 저녁 9시가 넘은 시각,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에서 혹시 누가 넘보기라도 할까봐 가방을 손에 꼭 쥐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에서 말을 걸었다.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덩치가 큰 흑인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드디어 내게도 올 것이 온 건가’ 하며 작은 목소리로 “응…? 왜 그러는데?”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빙긋 웃으며 “이 가방 어디서 샀니?”라고 물었다. “한국에서 사온 건데…?” “그렇구나. 무늬가 예뻐서.” 옆에 있던 친구로 보이는 여자는 “너는 돈도 없으면서 무슨 가방 타령이니?” 하며 타박했다. 그렇게 둘은 삐죽거리더니 “안녕! 고마워!”라고 인사하며 때마침 도착한 버스를 탔다.

내가 다니는 런던대학 골드스미스칼리지는 뉴크로스 지역에 있다. 이 지역에는 흑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그래서 늘 ‘위험지역’으로 분류된다. 우리 학교 학생들 중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은 영국의 날씨만큼이나 안전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 물론 얘기의 주제는 ‘이 동네가 얼마나 위험한가. 고로 우리는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이다. ‘얼마 전에 누가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는 일화 덕분에 처음 한 달 동안은 해가 떨어진 다음에는 길을 가다가 10대나 20대 흑인 청년을 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서의 일이 있은 뒤 나의 두려움이 얼마나 유치하며 내가 흑인에 대해,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인종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듣는 과목은 모두 3개다. 모든 수업에서 적어도 2주 이상 배우는 것이 문화 정체성과 인종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과 논의다. 강의가 끝나고 이어지는 세미나에서 자주 인종 문제에 대해 토론한다. 동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서유럽, 동유럽 등 다양한 대륙과 국가에서 온 친구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다. “아직까지 인종에 대해 얘기해야 할까?” “지금도 흑인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을 심어놓는 미디어가 얼마나 많은데?”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이야. 아직도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건 멍청한 일이지.” 개인적인 경험과 이론에 대한 생각 등으로 뒤죽박죽인 토론에서 나를 포함한 동양인들은 주로 이 주제에서는 방청객에 가깝다. 왜? 할 말이 없으니까.

강의를 들을 때는 다 이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세미나에서 내 의견을 얘기하라고 하면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의견을 갖기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오바마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고, 를 비롯한 방송과 영화에서 본 것에 대해 맞장구를 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시사나 상식에 대해 ‘아는 척’하며 얘기하는 것과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에서 의견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토론 중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흑인 친구나 인종 문제에서 자기 경험을 꺼내놓는 친구들을 볼 때면, 가끔씩 부럽기도 하다.

런던 생활 세 달째, 아직까지 나에게 인종 문제는 복잡한 질문일 뿐이다. 1년이 지난다고 해서 대단한 걸 알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복잡한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구해볼 생각이다.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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