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드라마 공모전의 심사를 맡았던 분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에는 유독 신문기자나 잡지기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그중 대부분은 인터뷰이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고. 아니 이럴 수가. 사귀라고 자리 펴준 소개팅에서 만나도 연애로 발전하기가 그리 힘든데, 길어야 2시간 얼굴 보고 일 얘기만 하다 돌아서면 끝인 인터뷰이와 사귀는 게 남들 눈에는 그렇게 쉬워 보이나?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문화방송의 새 일일드라마 를 보다가 나는 먹던 밥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비록 아직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어쨌든 작품이 끝날 때쯤엔 결혼한 사이가 되어 있을 영민(이정진)과 미수(이유리)가 바로 그 ‘기자와 인터뷰이 커플’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에게는 인터뷰 전 연애하라고 만들어준 기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이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의 80% 이상이 연예인인데다 언제나 인터뷰이를 소중한 고객처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아니 마지막 질문까지 무사히 마치겠다는 서비스 정신으로 가득 찬 나로서는 일단 미수처럼 상대의 인간성을 들먹이는 훈계 따위는 꿈도 못 꾼다. 인터뷰 할 배우가 스케줄을 갑자기 뒤집는 바람에 1년 만에 잡힌 소개팅이 날아갔을 때도, 인터뷰이의 실수로 촬영 장소에서 쫓겨났을 때도 그 모든 것은 ‘내 탓이오’일 뿐이었다. 한번은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꽃미남 신인 배우를 인터뷰하던 중 그가 집 근처 헬스클럽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다니려던 헬스클럽 등록을 포기했다. 내 팔뚝만큼 가느다란 다리의 소유자인 그와 운동복 차림에 땀투성이 얼굴로 마주쳐봤자 회사 망신밖에 더 되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와 이야기할 때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인터뷰이도 종종 있고, 다음에 자기 공연을 보러 와서 연락하라는 사람도 있다. 아주 가끔은 기사가 나간 뒤 매니저가 아닌 연예인으로부터 직접 고맙다는 문자가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소심한 나는 시간 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했다는 답장 하나 달랑 보낸 뒤 내게 온 문자를 보관함에 곱게 챙겨넣는다. 기자에겐 그거면 충분하지. 연락도 부담스러운 그분들과 ‘감히’ 연애는 무슨. 현실에 그런 기자는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 때 그렇게 사랑했던 윤종신 ‘오빠’가 결혼 상대를 만난 계기도 당시 테니스 잡지 기자였던 부인이 취재를 오면서였고, 최근에는 바둑기사 이창호 9단도 인터뷰를 통해 만난 바둑 기자와 열애 중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새삼 좌절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어느 선배의 말대로 “안 생기는 분들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어떤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정체 모를 나긋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게 느껴진다. “잘생긴 남자 배우랑 단둘이 인터뷰하고 분위기 좋으면, 생길 것 같죠? 안 생겨요. 진짜 웃긴 개그맨이랑 개인기하고 아이디어 주고받으면, 생길 것 같죠? 안 생겨요. 그래도 혹시나 싶죠? 안.생.겨.요.”
최지은 기자·10-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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