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송혜교에게 공감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달린 여자라는 기본 조건만 빼면 나와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그 아가씨에게. 물론 이건 한국방송 에서 송혜교가 연기하는 주준영을 보며 하는 생각이다.
일 잘하고 성격 똑 부러지고 방송가에서 촉망받는 신예 드라마 감독이지만 준영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블랙홀이 있다.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데, 애인의 심정을 헤아리거나 동료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고, 사실은 왜 그래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남의 기분은 생각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누가 조금만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하면 화를 벌컥 내고, 남들이 그런 자신을 보며 뜨악해해도 “나 못된 거 이제 알았어?”라고 뻔뻔하게 받아치는 주준영. 그런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뜨끔한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매일 밤 불안해서 잠이 안 왔다. 기사 하나 망치면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았고, 그날로 우리 회사가 망할 것 같았다. 나 힘든 게 제일 중요하고 내 일 무사히 끝내는 게 제일 먼저였다. 그래서 가족이든 동료든 남자친구든, 나와 내 일 사이를 가로막는 사람은 가차 없이 들이받았다. 인상을 쓰고 닦달을 할 때마다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마감 끝나고 생각해보겠다며 애써 마음속 블랙홀로 밀어넣었다. 가끔씩 “아휴, 저 싸가지…”라며 혀를 차는 사람에게는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나 원래 이런 줄 몰랐어?”
그래서 나는 동료이자 남자친구인 지오(현빈)로부터 “넌 너무 생각이 없어”라는 지적을 받고 억울해 어쩔 줄 몰라하는, 절차 같은 건 무시한 채 일을 진행시키다 태클이 걸리면 “하지 말라면 안 할… 근데 하면 안 돼요?”라며 콱 들이받는 이 아가씨가 남 같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잘하고 싶어서 가시를 세우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전히 회사에 돈 없는 거 뻔히 알면서도 “일러스트 쓰지 말라면 안 쓸… 근데 쓰고 싶어요!”라고 떼를 쓰고, 꼬박 한나절 촬영 뒤에도 재미있는 현장 사진 한 컷을 더 건지고 싶어서 사진기자에게 1시간만 더 기다리자고 우겨댄다. 그런데 을 보면서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지금 준영이 같은 짓을 하고 있구나. 얼른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다.
어쩌면 의 시청률이 높지 않은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딴 세상 얘기 같은 드라마, 도저히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알 수 없는 주인공들을 깔깔대고 비웃은 뒤 돌아서면 그냥 잊고 싶은데 이 드라마는 내가 과거에 했던 짓들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자꾸 들여다보게 한다. 내 몸 하나 챙겨 살아남는 것조차 아슬아슬하고 피곤한 요즘 세상에, ‘드라마 주제에’ 생각할 구석이 너무 많은 이 작품은 확실히 ‘실용적’이지 않다. 하지만 입맛이 없다고 툴툴대며 잡곡밥을 꺼리는 나에게 어머니는 늘 참을성 있게 말씀하셨다. “꼭꼭 씹어먹다 보면 고소해.” 정말이다. 은 찬찬히 뜯어볼수록 고소하고 재미있다.
최지은 기자 www.10-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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