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계산을 넘어서…‘호의의 사슬’이 좁은 세계를 부수는 이야기예전에 함께 살았던 친구 H는 1년 내내 쓸 짐을 넣은 캐리어 하나―놀랍게도 그 안에는 침대시트와 액자까지 들어 있었다―를 들고 집에 도착했다. H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았고 집에서 쓸 거의 모든 가구를 거리에서 주워왔으며,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면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까...2025-11-26 17:43
트럼프 폭정 시대, 불법이 된 이 책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난 작가 키에스 레이먼의 ‘헤비’(장주연 옮김, 교유서가 펴냄)를 읽으며 나는 소리를 지르고 키들키들 웃었으며 격분했고 마음이 무너졌다. 미국에서 ‘무겁고 검은’ 몸의 남자아이로 자라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나 같은 사람이 고작...2025-10-29 14:39
퀴어 가정 폭력,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시작부터 의심을 감수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양쪽 입장을 다 들어보기 전까지 우리는 모르지, 특히 연인 사이의 일은’이라는 강력한 믿음 앞에서, 입증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퀴어 연애에서의 언어적·정서적·심리적 학대라는, 때리는 남자도 매...2025-09-28 15:55
이스라엘 폭력이 같은 공간에서 다른 몸들에 반복되고 있다‘나’는 우연히 어떤 기사를 읽게 된다. 1949년 8월의 어느 날, 이스라엘 점령 지역의 네게브사막에서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하고 살해당한 베두인 소녀에 대한 기사다. 나는 이 이야기에 사로잡힌다. 소녀가 죽은 날짜와 사반세기 이후 내가 태어난 날이 같다는...2025-08-29 16:59
흑인 여성 시인, 백인 남성 향한 무모하리만큼 집요한 말 걸기나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3년을 살았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눈에 띄거나 반대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는 일이 많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나의 인종을 경험’한 셈이었다. 학교에서 가끔 만나는 평범한 한국인들은 (아무도 못 알아들으리라 넘겨짚고 한국말로) 차별...2025-07-23 13:48
베트남 보트피플이 그린 기억의 실개천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한 음절의 단어, ‘루’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을 집어 들게 된 것은 다음 구절 때문이었다.“어렸을 때는 전쟁이 평화의 반대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이 전쟁 중일 때는 평화롭게 살았고, 사람들이 무기를 내려놓은 뒤에 오히려 전쟁을 치렀...2025-07-03 16:05
어른이 고마워해야 할 어린이 성교육 책얼마 전 뉴스타파의 보도를 통해 극우 성향 단체인 ‘리박스쿨’이 윤석열 정권 교육부에 정책 자문을 하고 초등학생들에게 방과 후 돌봄을 제공하는 ‘늘봄학교’에 프로그램을 공급했음이 드러났다. 하루 만에 뚝딱 발급되는 의심스러운 강사 자격증을 미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댓글...2025-06-12 14:00
‘가족’을 폐지하면 좋지 아니한가나는 동료 한국인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을 빙자해 ‘나는 솔로’를 시청한다. 영숙, 영수, 영철, 옥순, 순자…. 1950년대 유행했던 한국인의 이름을 달고—그들이 고른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따라 부여받은 이름이다— 며칠 동안 합숙하며 이성애 짝짓기를 위해 기상천외한 드...2025-05-18 16:57
두 언어가 만나는 순간,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누군가 우아하게 살던 곳으로 들어간다는 게, 당신의 영혼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게 정돈된 곳으로 들어간다는 게 마뜩잖았습니다.”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단편소설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드러누운 밤’, 박병규 ...2025-04-30 16:23
아픈 친구의 나라에 어떤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분노와 좌절이 널뛰는 마음으로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기다리다 4월이 왔다. 탄핵 선고가 나올 때까지 모든 일정이 긴급이고 일상은 예외 상태가 돼버린 활동가 친구가 길바닥에 앉아 김밥을 먹는 사진을 보았다. 한 손에 ‘윤석열들 없는 나라,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팻말을 든...2025-04-10 15:12
‘정상 사회’를 비틀며 웃기고, 울리고작가 이반지하의 에세이 ‘부치의 자궁’이 ‘부치 팰리스 포 더 선’(Butch Palace for the Son·아들을 위한 부치궁)이라는 제목을 달고 그의 글 중 처음 영어로 번역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년에 접어든 또래 부치(이른바 ‘남성적’으로 여겨지는 성별 표현...2025-03-20 14:37
소설 속 호러보다 ‘험한’ 현실 1월 아르헨티나의 후덥지근한 여름, 후안과 여섯 살 아들 가스파르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날 짐을 챙긴다. 아르헨티나 북부를 향해 긴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그들 주위에는 불안한 기운이 가득하다. 얼마 전 엄마 로사리오를 석연치 않은 사고로 잃고 아직 슬픔에서 ...2025-02-19 14:02
“남의 병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을 거야”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는 연말이 지났다. 한 송년 모임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스티커를 선물받았다. “남자는 쏙 빠진 고부갈등”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오, 레즈비언 며느리랑 시어머니인가!”라고 외쳤다. 옆에서 그 문구는 (미디어에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에 해당한다...2025-01-27 13:41
‘마리까’의 이름으로 다름을 외치다비상계엄이 포고된 2024년 12월3일 밤 이후 광장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울렸다. ‘내란수괴 즉각 퇴진’이라는 하나의 열망으로 쉽사리 묶일 수 없는 많은 차이가 그 안에 있었다. “투쟁 현장에서 소수자 혐오를 막을 것”이라고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가 말했다. 전국장애인...2024-12-25 16:57
차별이 만든 ‘숨막히는' 현실,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혁명적 의미나는 명상이 싫었다. 어머니 지구, 영성, 치유, 비폭력 대화가 싫었던 것과 동일한 이유다. 여성주의가 세상을 바꾸지 못해서 다치고 아픈 여자들이 결국 내면의 평화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서, 어쩌면 그보다도 그걸 하는 여자들이 서로의 속을 뒤집고 지지고 볶는 것이 넌...2024-12-04 18:14